2007년 타결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에 참여한 경제 원로들이 17년 만에 한자리에 모였다. 한국개발연구원(KDI)과 ‘육성으로 듣는 경제 기적 편찬위원회’가 25일 서울 명동 은행회관에서 개최한 ‘코리안 미러클 8: 한·미 FTA, 글로벌 경제를 향한 비전’ 발간 보고회에서다.
전직 경제 관료들의 모임인 재경회와 KDI는 2011년부터 한국 경제 발전에 결정적 역할을 한 관료들의 정책 수립 경험과 지혜를 공유하는 ‘코리안 미러클 시리즈’를 발간하고 있다. 이날 행사에는 윤대희 전 국무조정실장을 비롯해 권오규 전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 박태호·김종훈 전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 등이 참석했다.
참석자들은 한·미 FTA 협상 당시 긴박했던 순간을 회고했다. 윤 전 실장은 한·미 양국 정상이 소고기 수입 개방 문제로 담판을 지은 순간을 ‘결정적 장면’으로 꼽았다. 2007년 3월 25일 미국이 소고기 수입 개방을 급작스레 협상 테이블에 올리면서 양국 협상이 결렬될 위기를 맞았다. 협상 시한을 1주일 남겨둔 시점이었다.
나흘 뒤 조지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은 노무현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한국 측이 소고기 수입 재개 시점을 서면으로 약속해달라”고 요구했다. 노 대통령은 “미국도 자동차 관세 유예 문제 등에 유연하게 임해달라”고 맞서면서도 “미국산 소고기가 불이익을 받는 일은 없게 할 테니 내게 그 문제를 맡겨달라”고 했다. 윤 전 실장은 “두 대통령이 의견을 교환하면서 비로소 협상이 조금씩 진전됐다”고 설명했다.
참석자들은 “한·미 FTA가 조금만 늦어졌더라면 한국이 지금과 같은 무역 성과를 거두지 못했을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최석영 전 주한 미국대사관 경제공사는 “협상 직후 미국의 민주당이 상·하원을 장악하면서 한·미 FTA가 한동안 동면 상태에 빠졌다”며 “노 전 대통령의 결단이 없었다면 지금의 한·미 FTA는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했다. 한국은 2014년부터 지난 10년간 연평균 약 230억달러의 대미 무역흑자를 기록했다.
한·미 FTA의 성과는 단순히 숫자로 표현되는 무역 실적에 그치지 않는다는 평가도 나왔다. 권 전 부총리는 “한국은 미국과의 FTA를 거쳐 FTA 허브 국가로 발돋움했다”며 “개방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극복한 점도 한·미 FTA가 가져다준 무형의 성과”라고 평가했다.
김 전 본부장은 “최근 국제통상 질서가 대전환기를 맞은 시점에서 한·미 FTA 과정과 성과를 온고지신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국제 통상 흐름에 대해 “세계무역기구(WTO) 체제는 무기력해지고 앞으로는 인도·태평양경제 프레임워크(IPEF)나 범대서양 무역투자동반자협정(TTIP), ‘칩4’ 동맹 같은 주제별 파트너십 위주로 흘러갈 것”이라고 전망했다. 박 전 본부장은 “한국이 개방을 일관되게 추진한다는 인식을 국제사회에 심어줘야 한다”고 했다.
이광식 기자 bumer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