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반도체 굴기’의 시계는 2021년 새로 ‘셋업’됐다. 그해 미국은 첨단 칩 제조에 필수인 네덜란드 ASML의 극자외선(EUV) 노광장비 중국 수출을 금지하는 등 급소를 찔렀다. 모두 “중국의 반도체 굴기는 끝났다”고 했지만 3년이 흐른 지금, 중국 반도체는 오히려 더 강해졌다.
미국의 제재로 2년간 스마트폰 신제품조차 내지 못하던 화웨이는 그사이 자체 개발한 ‘중국산 두뇌’(AP)를 넣은 스마트폰으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이 덕분에 화웨이는 중국 시장에서 애플을 제치고 처음으로 스마트폰 시장 1위에 올랐다.
지난 15일 방문한 화웨이 선전 본사에는 5단 피라미드 형태의 ‘화웨이 기술 생태계 구조도’가 마련돼 있었다. 한국 언론에 처음 공개했다. 인공지능(AI) 반도체부터 대규모언어모델(LLM), 스마트카 솔루션, 전기차 충전 등 첨단 사업에 모두 발을 뻗은 화웨이의 사업 영역을 한눈에 보여줬다. 화웨이 고위 관계자는 “화웨이는 10~20년 뒤를 내다보는 연구개발(R&D) 기업”이라며 “세상을 놀라게 할 새로운 비밀 병기를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화웨이가 지난해 R&D에 쏟아부은 돈은 매출의 23.4%인 232억달러(약 32조원)에 달했다. 반도체는 이런 화웨이가 가장 공들이는 분야다. 설계부터 제조까지 총 12개 반도체 자회사를 거느리고 있다. 이 덕분에 화웨이가 설계하고 SMIC가 제조한 AI 반도체 ‘어센드910B’는 엔비디아 H100의 유일한 대항마로 꼽힌다. 파운드리 미세공정 격차가 1년 이내로 좁혀졌다는 분석도 나온다. 자체 기술력을 끌어올리는 식으로 미국 제재를 무력화했다는 의미다.
중국은 270억달러(약 36조원) 규모 반도체 자립 펀드를 조성해 연내 반도체 장비의 80%를 국산화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우근 칭화대 집적회로학원(반도체 대학원) 교수는 “중국은 반도체 설계회사인 영국 ARM의 특허를 피하기 위해 칩렛 기술 표준화에 힘쓰는 등 자체 기술로 서방의 제재에 맞서고 있다”고 말했다.
선전=정지은/상하이=박의명 기자 jeo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