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일 이탈리아 베네치아에 있는 몰타 수도원. 600여 년 전 전투를 앞둔 기사단원들이 숨을 고르던 이곳에 퉁소 소리가 울려 퍼졌다. ‘현대자동차와 함께하는 한국미술의 밤’ 행사에서 곽훈 화백(82)이 30년 전 선보인 ‘겁/소리’ 퍼포먼스를 재현한 것이다.
한스 울리히 영국 서펜타인갤러리 디렉터, 조각 거장 앤서니 곰리 등 미술계 유명 인사 300여 명으로 가득 찬 이날 행사의 스폰서는 현대차였다. 현대차는 ‘미술 올림픽’으로 불리는 베네치아 비엔날레에 들어선 한국관 전시를 후원했다. 인근에 있는 영국관 대표작가로 출전한 존 아캄프라의 ‘뒷배’는 LG전자였고, 개막 전후 사흘간 ‘한국식 춤판’을 펼친 무용가 안은미의 이탈리아행(行)을 도운 건 삼성이었다. 현대차·LG·삼성, 베네치아 찾아
삼성 현대차 LG 등 국내 대기업들이 ‘예술 마케팅’에 힘을 주고 있다. ‘예술을 사랑하는 기업’이란 브랜드 이미지를 심을 수 있는 데다 주머니가 넉넉한 미술·클래식 애호가들을 ‘잠재 고객’으로 확보할 수 있어서다. 예술계가 20일(현지시간) 공식 개막한 세계 최고 권위의 국제미술제인 베네치아 비엔날레의 또 다른 주인공을 현대차, LG전자 등 후원 기업으로 꼽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올해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가장 주목받은 작품 중 하나인 아캄프라의 전시작은 40여 대의 LG전자 ‘올레드TV’로 구현됐다. LG전자 관계자는 “전시장을 찾은 수많은 관람객의 눈에 자연스럽게 ‘올레드TV=뛰어난 화질’이 입력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행사에서 안은미를 후원한 삼성은 여러 예술가와 예술 애호가로부터 “행사 때마다 빠지지 않는 고마운 기업”이란 얘기를 들었다.
국내 대기업들이 ‘예술 마케팅’을 본격화한 건 10여 년 전부터다. 국내를 넘어 세계에서 인정받는 프리미엄 브랜드로 뛰어오르기 시작한 시점이다. 현대차는 한국 국립현대미술관(2013년) 후원을 시작으로 영국 테이트 미술관(2014년) 등과 장기 파트너십을 맺었다. 현대차 관계자는 “미술관을 찾는 관람객들에게 현대차와 제네시스를 알리는 데 도움이 됐다”며 “브랜드 이미지를 고급스럽게 만드는 데 예술 마케팅이 한몫한 셈”이라고 말했다.
LG전자는 ㈜LG, LG디스플레이 등과 함께 매년 100만 명 넘는 관람객이 찾는 미국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을 후원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오스트리아 벨베데레 미술관 등 세계 50여 개 미술관과 파트너십을 맺고 빈센트 반 고흐 등의 명작 2000여 점을 삼성전자 TV를 통해 4K 화질로 시청자들에게 전달하고 있다. “예술, 브랜드 명성 높여”기업이 브랜드의 격을 높이기 위해 예술과 손잡는 건 글로벌 프리미엄 업체에는 일종의 ‘공식’이 됐다. 1975년부터 예술가들과 함께 ‘아트카’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BMW가 대표적이다. 이 프로젝트에는 앤디 워홀, 제프 쿤스, 알렉산더 칼더 등 세계적인 미술인들이 참여했다. 업계 관계자는 “예술이란 옷을 입자 BMW의 프리미엄 이미지가 한층 더 굳건해졌다”고 했다. BMW는 올해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도 독일관 공식 후원사로 이름을 올렸다. 포르쉐는 런던 아트페어, 마세라티는 아트 두바이 등 다양한 예술 활동을 후원하고 있다.
명품 및 패션업계도 ‘예술의 힘’을 잘 아는 업종이다. “예술은 브랜드 명성과 자산 가치를 높인다”는 세계적인 건축가 피터 마리노의 말 그대로다. 그는 서울 청담동 샤넬 플래그십 스토어를 설계하며 이곳에 애그니스 마틴, 이우환 등의 작품을 직접 골라 전시했다. 명품 브랜드들은 올해 베네치아 비엔날레도 뜨겁게 달궜다. 토즈, 프라다, 루이비통 등은 개별 전시를 마련했고 샤넬은 프랑스 국가관을 후원했다. 까르띠에는 페기 구겐하임 미술관 공식 후원사로 나섰다.
예술계 관계자는 “예술은 고소득층의 관심사에 빠지지 않는 분야”라며 “브랜드 격을 올리고 싶은 기업들이 유명 전시회와 클래식 공연 후원에 앞다퉈 뛰어드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김진원 기자/베네치아=김보라/안시욱 기자 jin1@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