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 인공지능(AI) 시대를 한 단계 더 진보시킬 기술로 햅틱(haptic·촉각)이 부상하고 있다. 키보드와 마우스, 조이스틱, 터치스크린, 웨어러블 슈트·장갑 등에 진동을 발생시켜 가상현실(VR)에서 촉감을 전달하는 기술인 햅틱은 ‘만지는’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형용사 ‘haptesthai’에서 유래됐다. 진입 장벽이 높아 뚜렷한 글로벌 기술 리더가 없는 만큼 대한민국이 공략하면 주도권을 쥘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사람 피부 적용한 로봇 곧 나온다”
국내 로봇 햅틱 연구개발(R&D) 권위자인 김정 KAIST 기계공학과 교수는 19일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인간 촉각과 감각 전달 원리를 모방해 인간처럼 촉각을 느낄 수 있고 상처 치유도 가능한 로봇 피부를 개발하고 있다”고 말문을 열었다. 세계에서도 보기 드문 햅틱 연구자인 김 교수가 수많은 분야 중 햅틱에 주목한 이유는 촉각 기술에 따라 로봇의 쓰임새가 무궁무진해서다. 그는 “현재 햅틱은 손가락에서 구현하는 데 그치지만 곧 로봇 몸체 전체를 덮는 ‘대면적 로봇 피부’로 연구가 확장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로봇 피부 연구의 핵심인 햅틱은 다양한 분야에서 사용이 늘어나는 추세다. 우주 분야에선 유럽우주국(ESA)이 국제우주정거장(ISS)에서 지구상 로봇을 조종하면서 촉각을 느끼는 햅틱을 도입하는 실험에 성공했다. 자동차 분야에서는 전면 디스플레이 화면을 보지 않고 촉각으로만 가상 버튼의 위치를 파악해 조작할 수 있는 ‘헤드업 햅틱 디스플레이’ 적용을 앞두고 있다. 의료 분야에선 수술 보조 로봇을 통해 환부와 장기 상태를 의료진이 수술 조이스틱으로 느끼는 햅틱이 적용되고 있다.
김 교수는 햅틱의 가능성을 무궁무진하다고 보고 로봇에 적용을 시도했다. 그는 “인간은 피부로 덮인 모든 부분에서 촉감을 느끼기 때문에 다양한 위험을 감지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며 “로봇은 딱딱한 소재의 외피로 구성돼 있고, 인간과의 물리적 교류도 디스플레이와 같은 특정 부위에서만 이뤄져 섬세한 촉각 정보를 수용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가장 진보한 로봇인 테슬라의 인간형(휴머노이드) 로봇 옵티머스조차 단단한 외피를 갖고 있다.
김 교수는 이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인간 피부의 다층 구조와 촉각을 느끼는 원리를 모사했다. 90% 이상이 물과 전해질로 이뤄진 하이드로젤과 실리콘 엘라스토머(탄성 플라스틱)로 다층 구조를 만들고 촉각 센서를 분산 배치한 로봇 피부를 개발했다. 이 로봇 피부는 촉각 신호를 인공지능(AI) 신경망으로 처리해 누르기, 쓰다듬기, 두드리기 등 촉각 자극 종류를 분류한다. 깊게 찢어지거나 베여도 촉각 감지 기능이 유지되고 상처 부위를 보수하면 기능도 다시 회복된다.
김 교수는 “이 기술로 사람 피부와 비슷한 물성과 질감도 구현했다”며 “서비스 로봇과 같이 사람과 다양한 접촉 및 상호작용이 필요한 응용 분야에 활용될 것”으로 내다봤다. 예를 들면 식당 서빙이나 조리, 청소 로봇에 적용할 수 있다. 로봇 피부를 의수·의족 피부로 사용하면 실제 손·다리와 똑같은 외형과 감각을 환자에게 제공할 수 있다. ○메타버스와 결합하는 햅틱 기술해외 정보기술(IT)계 주요 인사의 발언을 통해서도 햅틱의 중요성을 엿볼 수 있다. 데미스 허사비스 구글 딥마인드 최고경영자(CEO)는 언어 모델을 기반으로 한 현재의 로봇 AI 시스템은 물리적으로 한계가 있다고 지적하며 대안으로 햅틱을 제시했다. 그는 “AI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시각, 청각을 넘어 촉각까지 포함하는 접근 방식이 필요하다”고 했다. 짐 팬 엔비디아 수석AI연구원도 촉각을 강조했다.
업계에선 진보한 햅틱 기술을 적용한 로봇에 메타버스, 확장현실(XR)이 결합하면 다양한 산업 현장에서 극사실적인 몰입도가 구현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언리얼(unreal)’을 ‘리얼(real)’로 만들어줄 변곡점으로 햅틱을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산업 현장에 XR 기기가 확산하면 햅틱 기술 이용이 늘어날 것이라는 데 이견이 없다. 메타와 애플, 삼성전자를 비롯한 세계적 빅테크들은 햅틱 R&D에 전사적으로 역량을 쏟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스태티스타에 따르면 햅틱이 적용될 가장 큰 시장인 글로벌 메타버스 시장 규모는 2022년 655억달러(약 90조원)에서 지난해 820억달러(약 113조원), 2030년 9366억달러(약 1300조원)로 성장할 전망이다.
국내 스타트업 중에도 햅틱을 파고들어 세계적 수준의 기술과 제품을 선보이는 업체가 나오고 있다. XR 촉각 솔루션 개발사인 비햅틱스는 자체 개발한 VR 전용 촉감 전달 웨어러블 슈트인 ‘택트수트(TactSuit X40)’와 촉감전달 장갑 ‘택트글러브(TactGlove)’를 세계 최대 IT·가전 전시회인 ‘CES 2024’에 선보여 참가 업체와 참관객으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었다.
김 교수는 “인간과 로봇이 공존하기 위해선 촉각 연구가 필수”라며 “로봇과 악수했을 때 차가운 쇠붙이 느낌이 아니라 따뜻한 촉감을 느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강경주 기자 qurasoh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