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박해" 혹평 받은 에르메스…결국 '신의 한수' 대반전 [김세린의 디자인 카페]

입력 2024-04-13 19:21
수정 2024-04-13 19:44


<i>"나는 혁신과 전통의 균형을 맞추려 노력한다. 아무것도 바꾸지 않기 위해 모든 것을 바꾼다."</i>

'명품 중의 명품'으로 꼽히는 프랑스 명품 브랜드 '에르메스'의 설립자 티에르 에르메스가 한 말입니다. 장인 정신과 독창성을 가진 에르메스를 대표하는 건 '켈리백'과 '버킨백'이지만, 가장 먼저 소비자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건 에르메스의 강렬한 주황빛 브랜드 컬러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1837년 파리에서 왕과 귀족들의 마구 용품을 만드는 사업을 시작해 오늘날 가장 대표적인 패션 브랜드로 성장하기까지. 오늘은 변화와 혁신의 대명사 에르메스를 대표하는 컬러의 태동부터, 운명을 함께해온 역사를 소개합니다. 값싸고 인기 없던 주황색, 브랜드 존폐 위기 속 빛을 내다
블랙 앤 화이트 일색인 럭셔리 브랜드 시장에서 에르메스만큼이나 주황색에 강한 정체성을 드러낸 브랜드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전 세계 연인들을 설레게 한 색'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미국 럭셔리 주얼리 브랜드 티파니앤코'(TIFANNY & CO)'의 '티파니 블루' 색처럼, 많은 이들이 에르메스의 로고가 찍힌 오렌지 박스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니 말입니다. 패션을 사랑하는 사람의 로망이자 명품 브랜드로 독보적인 역사를 쓴 에르메스는 언제부터 오렌지를 대표 색상으로 사용했을까요.

1920년대 초반에만 해도 에르메스는 포장 박스에 크림색 바탕에 금색 선이 들어간 패키지를 사용했습니다. 점차 제품군에 따라 상자의 색상도 다양해지던 때입니다. 그런데 제1,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물자 공급이 어려워지자, 패키지를 머스터드(짙은 노란색) 컬러로 변경했습니다. 하지만 이마저도 전쟁으로 인해 염료가 부족해지자, 당시 유럽에서 비교적 구하기 쉽고 저렴했던 주황색 염료를 패키지에 적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주황색이 천연가죽색과 가장 흡사한 색이었던 탓도 있습니다.


사실 주황색은 유럽에서 친근한 컬러가 아니었습니다. 다른 컬러에 비해 정착된 시기도 짧을뿐더러, 이국적인 색채가 강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전통을 목숨같이 여기는 에르메스에 이는 큰 위험 요소였습니다. 당시 주황색은 원색도 아닌 혼합색으로, 다소 가벼운 느낌에 미성숙하고 경박한 이미지를 갖는다는 평가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에르메스는 생소하고 이국적이며, 전통적이라기엔 다소 미약한 오렌지의 힘을 믿었습니다.

디자이너들에게 있어 주황(Orange)색은 강렬한 채도를 가진 붉은색과 에너지 높은 노란색이 만나 만들어진 컬러로, 미각과 후각을 자극하는 가장 상큼한 색 중 하나로 꼽힙니다. 오렌지색의 어원은 잘 익은 과일 오렌지의 컬러에서 따온 것으로, 산스크리트어 'naranga'를 거쳐 고대 프랑스어 'orenge'의 형태로 진화하며 유래했습니다. 색을 상징하는 단어로는 친밀한, 따뜻한, 명랑한, 즐거운, 활동적인, 에너지, 가을 등이 있습니다. 에르메스는 이런 오렌지색을 과감하게 사용할 것을 결정했고 고유의 상징을 만들어 냈습니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사용한 색이 지금의 에르메스의 정체성을 만들었습니다. 덕분에 에르메스는 브랜드 컬러 하나만으로도 '새롭고 혁신적이며 창조적인' 의미를 가지게 되면서 절대적 차별성을 만들었습니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에르메스의 오렌지는 로고와 패키지, 인테리어 전반에 두루 활용되고 있습니다. 특히 주황색이 두드러지는 포장지에는 오렌지색을 바탕으로 브라운 색상의 라이닝과 에르메스 로고가 새겨져 있습니다. 이 색들의 조합은 시간에 영향을 받지 않는 에르메스 특유의 품질과 호화로움을 또렷이 상기시킵니다.


에르메스의 오렌지를 더욱 빛나게 한 로고의 역사에 대해서도 짚고 넘어가 보겠습니다. 1945년 에르메스는 로고인 '사륜마차 깔레쉬'(Caleche, 마차)를 법적 효력을 가진 상표로 등록했는데, 이 로고 디자인은 프랑스 화가 알프레드 드 드뢰(Alfred de Dreux)의 19세기 석판화 '르 뒤끄 아뗄'(Le Duc Attele)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그림 속에는 당시 귀부인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뒤끄'라는 고급 마차가 마부 석이 빈 채로 묘사되어 있었습니다. 이 그림을 활용한 에르메스의 로고는 에르메스가 고삐를 조정할 고객을 기다리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냈습니다.

에르메스의 집념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현재 에르메스는 마구를 만들던 시절부터 이어져 내려온 장인정신과 노하우, 최상급 가죽과 염색 기술로 다른 브랜드가 감히 따라 만들 수 없는 선명하고 맑은 원색의 제품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가죽을 활용한 각종 가방 등 장신구를 비롯해 가구까지, 최근에는 화장품까지 선보이며 제품을 다각화하고 있습니다. 브랜드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예술가와 함께한 작업은 에르메스의 번영에 있어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산업 디자이너와는 제품에 도안을 넣는 방식으로, 순수 미술가와는 비영리 재단을 통해 그들을 후원하는 방식으로, 아트 컬래버레이션을 통해 브랜드 이미지를 높이는 데 성공한 것입니다.


에르메스가 더 성장할 수 있었던 건 그들만의 정체성이 강했던 영향도 컸을 것입니다. 에르메스 전 회장인 장 루이 뒤마는 "에르메스 최초의 고객은 말이다. 말은 광고를 볼 줄도 모르고 세일이나 판촉 행사에 초대되지도 않는다. 오직 그들의 몸 위에 얹어진 안장이, 그들을 재촉하는 채찍이, 발에 신겨진 말발굽이 얼마나 편안하고 부드러운지에 따라 더 행복하고 더 잘 달릴 뿐이다"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이런 발언은 마케팅이나 광고보다는, 오로지 품질에 초점을 맞추고자 하는 철학이 잘 드러난 대목입니다.

2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전통적인 유럽 장인 정신과 함께 세련미와 절제미를 고수하겠다는 신조를 가진 에르메스. 전통과 혁신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지켜온 브랜드의 철학과, 지금껏 걸어온 길이 컬러의 속성과 만나 더 빛을 냈습니다. 컬러는 브랜드를 대표하기도 하지만 브랜드의 철학과 정신을 입어 진화하기도 합니다. 에르메스의 오렌지는 앞으로도 꾸준히 브랜드와 컬러 간 창조적 가능성을 보여주는 지표가 될 것으로 기대됩니다.

<i>*이번 기사는 'Aesthetic Intelligence'(Pauline Brown 지음), '패션앤아트'(김영애 지음), '컬러인사이드'(황지혜 지음) 등을 을 참조해 작성했습니다.</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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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린 한경닷컴 기자 celin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