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달항아리는 컬렉터들의 희망 소장품 1순위로 꼽힌다. 지난해 크리스티와 소더비 등 세계 양대 경매회사에서 각각 60억원과 47억원에 거래됐을 정도로 인기가 높다. 소박한 듯하면서도 유려한 자태로 뿜어내는 한국적인 멋은 소장 욕구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작가 김시영과 이상협은 달항아리의 또 다른 매력을 찾았다. ‘백자(白磁)’의 틀을 넘어서면서다. 이들의 달항아리는 검고 뜨거우며 눈이 부시게 빛난다. 서울 인사동 갤러리밈의 ‘검고 뜨거운 차고 빛나는’ 기획전은 김시영의 흑도자기 21점과 이상협의 은(銀) 달항아리 8점을 한 번에 감상할 기회다. 고려의 흑자 잇는 ‘검은 달항아리’‘화염의 연금술사’로 잘 알려진 김시영은 국내 유일한 흑자 도예가다. 고려시대 이후 명맥이 끊긴 전통 흑자를 현대적으로 계승했다고 평가받는 작가다. 일본에서 서도가로 활동하던 부친 밑에서 먹을 갈며 자랐다. 검은색을 깊이 들여다봤던 김시영은 중국 일본과 달리 한국에서만 명맥이 끊겨가는 흑자를 되살리고 싶었다. 그는 고려시대 가마터에 흩어진 흑자 파편의 매력에 빠진 뒤 필요한 흙을 찾아 전국을 헤맸다.
그의 작품들은 1320~1450도 고온의 가마에서 구워 검은색은 물론 금빛부터 청록색, 분홍빛까지 다양한 색깔과 형태를 자랑한다. 작가는 흑자를 굽는 과정을 두고 “흙 속 다양한 광물질을 깨우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이번 전시에 선보인 작품에는 ‘행성(Planet)’이란 이름을 붙였다. 흙과 불이 만나 탄생한 우주를 형상화했다는 의미에서다. 달항아리의 넉넉한 공간감을 본뜬 ‘Planet TL 1’이 대표적이다.
1988년부터 흙과 불의 조합을 실험한 그의 작품 세계는 최근 덩어리진 질량을 강조한 추상 조각에 이르고 있다. 달항아리의 은유 버전인 ‘행성 메타포’는 ‘입 없는 도자기’로도 불린다. 항아리의 실용적 특성을 넘어 자유롭게 변주한 추상 조각에 가까워진 형태다. 작가는 덩어리진 질감에 인간에 신체 이미지를 결합하거나 일그러진 형태마저 작품으로 승화하는 파격적인 실험을 이어가고 있다.
고요한 멋의 ‘은 달항아리’이상협의 달항아리는 소리 없이 흐르는 물처럼 고요한 멋을 지닌다. 작가의 주요 개념은 ‘흐름(flow)’이다. 차갑고 단단한 금속의 물성을 흘러내리고 녹아내리는 듯한 부드럽고 따뜻한 질감으로 재해석했다. 금속공예를 전공한 이상협은 지난 17년간 영국을 주 무대로 활동했다. 세계적인 조각가 앤서니 곰리와 협업할 정도로 실력 면에서 인정받은 장인이다. 그의 작품은 영국 빅토리아&앨버트박물관, 미국 필라델피아박물관 등이 소장하고 있다.
무게 11㎏, 두께 5.5㎜ 은판이 달항아리의 형상으로 재탄생하는 과정엔 지난한 노동이 수반된다. 직경 50㎝가 넘는 틀을 잡는 과정에만 수만 번의 망치질이 필요하다. 항아리 주둥이를 좁히고, 구의 어깨 볼륨을 낮추는 등 작가만의 비율과 미학을 덧입힌 끝에 탄생한 ‘달(Moon)’ 연작은 시시각각 변화하는 달의 모양을 형상화했다.
값비싼 은의 태생적 물성 때문일까. 순백의 광채를 뽐내는 은 달항아리는 별다른 장식 없이도 보는 이를 현혹한다. 조정아 갤러리밈 큐레이터는 “애초 이상협의 은기를 창문으로 뚫린 전시장 1층에 전시할까 고민했는데 도난 위험을 염려해 5~6층으로 옮겨 전시했을 정도”라고 했다. 전시는 5월 3일까지.
안시욱 기자 siook9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