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은정의 골프인사이드] 퍼터, 세계랭킹 1위의 플레이를 바꾸다

입력 2024-04-07 11:57
수정 2024-04-07 11:58



'우승없는 세계랭킹 1위'. 스코티 셰플러(미국)가 약 20주간 자신을 따라다녔던 꼬리표를 떼어낸데는 퍼터의 역할이 가장 컸다. 그간 고수하던 일자 모양 헤드의 블레이드 퍼터에서 헤드 뒤쪽이 튀어나온 말렛형 퍼터로 바꾼 직후 지난 2월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WM피닉스오픈에서 타이틀 방어에 성공했고 특급대회인 아놀드파머 인비테이셔널, '제5의 메이저' 플레이어스 챔피언십까지 거머쥐었다.

이처럼 세계 최정상 선수들은 퍼팅에 문제를 겪을때 종종 퍼터를 바꾼다. 또 퍼팅에 문제가 없다면 평생 한가지 모델을 고수하기도 한다. AT&T페블비치 프로암 우승자인 윈덤 클라크(미국)는 이 대회 출전 직전까지 연습그린에서 퍼터 9개 모델을 두고 고심했다고 한다. 가장 간단한 것처럼 보이는 퍼터에 드라이버보다 많은 기술 특허가 들어 있다. 헤드 모양과 샤프트 길이, 헤드 무게 등에 다양한 옵션이 있기 때문이다.



드라이버 헤드 소재가 감나무에서 티타늄으로 바뀐 것처럼 퍼터 헤드도 나무에서 금속으로 바뀌었다. 발전한 골프공 소재에 맞추기 위해서였다. 퍼터 변천에 가장 큰 영향을 준 혁신적인 두 인물은 카스텐 솔하임(미국)과 스카티 카메론(미국)이다. 솔하임은 헤드에 볼이 맞는 ‘핑’ 소리 그대로 브랜드명을 'PING'이라 지었다. 아들에 이어 손자까지 대를 이어가는 클럽 제조사다.

솔하임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구두수선집의 수선공에서 출발해 40대까지 제너럴 일렉트릭(GE)의 엔지니어로 일했다. 골프가 취미였던 그는 많은 미국의 발명가가 그랬듯 자신의 집 차고에서 퍼터를 설계하기 시작했다. 핑이라는 회사를 만든 건 1959년이다. 미국에 한창 골프붐이 일던 시기다. 가족의 부업으로 시작했지만 첫 퍼터는 전 세계 퍼터의 60%를 점유할 만큼 명성을 얻었다. 지금도 신제품에 흔히 설명되는 토-힐 밸런스와 헤드 페이스의 정밀주조공법을 처음 내놓은 것이 핑이다. 그 중 핑의 ‘원픽’ 모델인 ‘앤서’는 1966년에 제작되어 가장 많이 팔린 퍼터, 가장 많은 우승 수를 가진 모델이 됐다.

스카티 카메론은 제작자 이름이 바로 브랜드가 된 케이스다. 카메론은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와 함께 퍼터 제작에 대해 공부했다고 한다. 1990년대에 여러 브랜드의 퍼터를 제작했고 미즈노에 독점적으로 퍼터를 공급하기도 했다. 1992년 핑 앤서 모양 헤드를 미즈노에 제안했다가 퇴짜를 맞자 아예 자신의 회사를 설립해 버렸다. 이듬해 마스터스에서 베른하르트 랑거(독일)가 이 퍼터를 들고 나와 우승하면서 퍼터의 리딩 브랜드로 직행했다. 1994년 타이틀리스트를 만드는 아쿠시네트가 여러 경쟁자를 뚫고 스카티 카메론을 인수했고, ‘골프황제’ 타이거 우즈(미국)의 퍼터로 함께하면서 추종을 불허하는 퍼터 브랜드가 됐다.

두 거장이 시장의 큰 흐름을 바꾸긴 했지만 역사상 가장 유명한 퍼터는 따로 있다. ‘구성(球聖)’ 보비 존스(미국)가 사용한 ‘캘러미티 제인’이다. 미국 서부 개척시대 여장부 마사 제인 카나리아의 별명이다. 존스는 1923년부터 7년 간 21개의 메이저 대회에 출전해 13승을 달성하는 동안 이 퍼터를 사용했다. PGA투어 최종전 투어챔피언십에서는 지금도 ‘캘러미티 제인’ 복제품을 부상으로 준다. 낡았지만 은빛 찬란한 이 퍼터로 공을 때리면 청명한 금속 소리가 난다. /골프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