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암이 흘러간 곳에 가장 먼저 피는 꽃을 그리다

입력 2024-04-02 18:49
수정 2024-04-03 00:41
레후아 꽃 덤불 사이로 소녀가 무언가를 응시하고, 붉은 새 한 마리는 붉은 황혼과 짙푸른 대지 사이의 경계를 가로지른다. 김상경 작가의 신작 ‘소녀와 레후아와 붉은 새’(2024)다.

김상경의 작품은 분출을 앞둔 화산 같은 긴장감을 자아낸다. 화면 속 풍경은 정적(靜的)이다. 하지만 그 안의 요소들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인상을 준다. 낮과 밤, 현실과 허구, 또는 삶과 죽음 사이 아슬아슬한 줄다리기를 묘사하면서다. 분위기뿐만이 아니다. 실제로 작품들은 화산섬을 배경으로 한다. 서울 평동 떼아트갤러리에서 지난 1일 열린 김상경의 개인전 ‘소녀와 레후아’에선 작가가 미국 하와이, 제주도 등지에서 영감을 받은 신작들을 선보인다. 작가는 풍경화를 자주 그렸는데 풍경 속에는 레후아도 있다. 하와이의 토종 식물 레후아는 용암이 굳은 암석 지대에 맨 처음 싹을 틔우는 꽃이다.

지난해 김상경은 서울대 호암교수회관에서 열린 개인전에서 하와이의 식생을 배경으로 반려견을 그린 ‘낮잠’(2023) 등을 선보였는데 이번 전시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소녀·소년을 풍경의 화자로 등장시키면서다. 소녀의 모티브는 작가의 어린 딸이다. 10여 년 전 작가의 수술을 앞두고 병실을 찾은 어린 딸의 조용하면서도 심각한 표정을 담았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벗어나서 마주친 딸에 대한 기억이 오랫동안 작가의 작품 세계를 추동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작품은 색이 분출하며 흘러넘치는 게 특징이다. 그래서인지 몽환적이면서도 뚜렷하다. 가로 2m에 달하는 캔버스에 널찍하게 펼쳐 보인 화면은 ‘그냥 지나쳐 가는 풍경’에 대한 시선을 전후좌우로 확장한다. 작가는 이번 전시를 통해 작품 세계의 출발점이었던 인물, 즉 인간이란 무엇인가와 삶의 영속성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척박한 환경에서 피어나는 붉은 레후아 꽃, 기운이 흐르는 대지, 트와일라이트의 하늘은 미지의 세계를 상징한다. 새는 미래를 함께 살아갈 동반자다. 그들이 건강한 미래를 씩씩하게 만들어 가기를 소망한다.” 전시는 오는 12일까지.

안시욱 기자 siook9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