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예측 가격왜곡에 '큰손' 기관 역차별 논란[회사채 활황의 이면②]

입력 2024-04-04 09:55
이 기사는 04월 04일 09:55 마켓인사이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회사채 주관사 선정 과정에서 증권사별로 투입할 수 있는 캡티브(Captive) 물량을 대놓고 비교하거나 특정 매수주문 금리를 꼭 집어주는 발행사의 ‘갑질’도 흔한 일입니다." (한 대형 증권사 회사채 발행 담당자)

증권사의 캡티브 영업은 채권발행시장(DCM) 시장의 오랜 관행으로 분류된다. 예년과 달라진 건 증권사들이 캡티브 영업을 활용하는 비중이 급속도로 확대됐다는 점이다. 실적 증대를 노리는 증권사와 조달 부담을 낮추려는 기업들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여파다.
회사채 경쟁 과열에 캡티브 영업 ‘급증’회사채 등 DCM 시장 영업 환경은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다. 대표적인 증권사 수익 창구였던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시장이 크게 위축된 여파다. IB 실적이 고꾸라지자 증권사들이 앞다퉈 회사채 등 전통 IB 부문을 새로운 먹거리로 점 찍었다. 유상증자, M&A 등을 위한 사전 작업으로 회사채 시장을 찾는 증권사도 늘어났다. 회사채 조달 과정에서 기업과 쌓은 인연이 '빅딜' 수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아서다.

이 과정에서 캡티브 영업을 남용하는 증권사들이 빠르게 확산됐다. 대형 증권사에 비해 주관 경험이나 인력 등이 부족한 중소형 증권사들은 캡티브 영업을 무기로 시장 개척에 나설 수밖에 없다고 호소한다. 리그테이블(실적) 방어에 나선 대형 증권사들도 캡티브 영업으로 맞대응하고 있는 모양새다.

회사채 시장에서 ‘갑(甲)’ 지위에 있는 발행사의 요구사항도 점차 노골적으로 변모하고 있다. 수요예측 물량 확보로 미매각 우려를 낮추는 동시에 이자 부담까지 줄일 수 있다는 점에서 캡티브 카드를 꺼내 들지 않는 기업들을 찾기 어려운 수준이다.

한 대형 증권사 회사채 발행 담당자는 "너무 과한 발행사의 갑질이 들어오면 차라리 수주를 포기하는 경우도 있다"면서 "회사채 주관사 선정을 무기로 증권사를 '꼭두각시'처럼 다루는 데 자괴감이 들 정도"라고 말했다.
회사채 수요예측 유명무실 우려캡티브 영업 확대의 가장 큰 문제점은 회사채 수요예측 제도가 사실상 유명무실한 제도로 전락할 수 있다는 점이다. 회사채 수요예측 제도는 가격 적정성과 투명성을 강화하기 위해 2012년 도입됐다. 공개 입찰을 통해 시장의 눈높이에 맞는 가격으로 조달에 나서라는 취지다.

하지만 '캡티브 폭탄'이 쏟아지면 회사채 수요예측은 제 구실을 할 수가 없다. 시장의 수요와 공급이 아닌 캡티브 물량 수준에 따라 회사채 가격이 책정되는 왜곡 현상이 심화하고 있다는 뜻이다.

기존 회사채 시장 ‘큰손’인 연기금·공제회 등 기관투자가의 불만이 폭발하고 있다는 것도 우려되는 사항이다. 주관사와 인수단에 포함된 증권사들의 ‘셀프 참여’에 회사채 물량조차 확보하기 어렵다는 게 이들의 지적이다. 기관들이 회사채 수요예측 과정에서 사실상 ‘들러리’ 역할에 그치고 있다는 볼멘소리도 나온다.
명확한 가이드라인 필요한 시점금융당국도 회사채 시장에 만연한 캡티브 영업의 악영향을 주시하고 있다. 이달 들어 금융감독원은 각 증권사 채권발행시장(DCM) 부서에 수요예측 결과표 등을 요청한 것으로 확인됐다. 회사채 수요예측 주문 기관과 물량 등을 꼼꼼하게 살펴보기 위한 취지다.

업계에서는 금융당국의 명확한 가이드라인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입을 모은다. 하지만 금융당국이 캡티브 영업 방지를 위한 구체적인 지시사항을 내려주기 어려울 것이란 시각이 많다. 무엇보다 자본시장법상 증권사들의 '제 살 깎아먹기' 경쟁인 캡티브 영업을 위법 행위라고 보기 어렵다는 게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내부 관계자가 아닌 이상 캡티브 영입을 위한 주문과 실제 회사채 투자를 위한 주문을 구분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도 걱정거리다.

금융감독원 측은 “캡티브 영업 관련해 회사채 시장에서 각종 잡음이 발생하고 있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며 “현황 파악 측면에서 각 증권사에 수요예측 결과표 등을 요청한 상태”라고 말했다.

장현주 기자 blackse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