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찌 신화' 만든 디자이너 '파격 행보'…"에르메스 잡는다"

입력 2024-03-29 09:52
수정 2024-03-29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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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명품업체 케링그룹이 ‘구찌 전성기’를 이끌었던 스타 디자이너 알레산드로 미켈레(51·사진)를 발렌티노의 크리에이티브디렉터(CD)로 재영입했다. 발렌티노를 디올·에르메스 등 최고급 브랜드의 경쟁 상대로 키우려는 야심이 반영된 인사라는 평가다.

미켈레의 발렌티노 합류 소식은 28일(현지시간) 보그비즈니스의 보도로 처음 알려졌다. 그는 내달 2일부로 발렌티노 CD에 정식 임명될 예정이다. 25여년간 발렌티노에 몸담아 오다 지난주 사임한 피엘파올로 파촐리의 후임이다. 미켈레는 인스타그램을 통해 “발렌티노에서 환영받는 일은 엄청난 영광”이라며 “큰 기쁨과 함께 책임감을 느낀다”는 소감을 밝혔다.

미켈레는 패션계에서 무명에 가까웠던 2015년 구찌의 CD로 전격 발탁됐다. 그가 선보인 파격적인 보헤미안풍 맥시멀리즘 스타일은 대중적으로 큰 호응을 얻으며 구찌를 화려하게 부활시켰다. 디오니소스백, 재키1961백 등이 미켈레 시대를 대표하는 제품들이다. 영국 가스 해리 스타일스, 미국 배우 자레드 레토, 다코타 존슨 등 유명인들이 그의 디자인에 애정을 보냈고, 미켈레는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그가 합류한 뒤 4년 만에 구찌 매출은 두 배로 뛰어 100억유로(약 14조5000억원)를 뛰어넘었다.


그러나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을 기점으로 유행을 타지 않는 패션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키치한 감성의 구찌는 매력을 잃기 시작했다. 경쟁사 대비 저조한 실적이 계속되자 미켈레는 2022년 11월 이에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그로부터 약 1년 6개월 후 미켈레는 케링그룹과 다시 인연을 맺게 됐다. 구찌의 모기업인 케링그룹은 작년 7월 17억유로(약 2조5000억원)를 들여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 발렌티노 지분 30%를 인수했다. 발렌티노는 현재 카타르 사모펀드인 메이훌라가 소유하고 있다. 케링그룹은 5년 뒤 발렌티노 지분 100%를 완전히 넘겨받을 수 있는 옵션도 계약에 포함시켰다.

미켈레를 다시 불러들인 건 그가 발렌티노에서 구찌의 영광을 재현해주길 바라는 케링그룹의 열망에서 비롯된 거란 해석이 나온다. 프랑수아 앙리 피노 케링그룹 회장 겸 최고경영자(CEO)는 성명에서 “미켈레는 자신의 문화적 특성과 창의성, 다재다능함을 이용해 발렌티노 고유의 유산을 능숙하게 해석해 내고, 이를 번영시킬 수 있다고 확신한다”며 “그의 열정과 상상력, 그리고 헌신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라치드 모하메드 라치드 발렌티노 회장 역시 미켈레를 “발렌티노에 대한 위대한 야망”이라고 표현했다. 과거 구찌에서 미켈레와 함께 일했던 적이 있는 야코포 벤투리니 발렌티노 CEO는 “미켈레와 다시 만나게 돼 매우 기쁘고, 흥분된다”고 했다.

시장에서도 긍정적인 반응이 나온다. 자산운용사 번스타인의 명품 산업 애널리스트인 루카 솔카는 이번 인사에 대해 “아주 잘한 결정일지 궁금하다. 그러나 감히 도전하는 사람이 승리하는 법”이라고 언급했다. 그는 “발렌티노에는 새로운 아이디어가 필요하다”며 “미켈레는 단지 ‘발렌투찌’(Valentucci)가 아닌, 독특하고 설득력 있으면서도 우리가 지금껏 봐 왔던 것과 연결돼 있는 새로운 발렌티노를 탄생시킬 것으로 기대된다”고 덧붙였다.

미켈레의 ‘뉴 발렌티노’는 오는 9월 파리패션위크에서 공개되는 첫 컬렉션에서 확인할 수 있을 전망이다. 1960년 로마에서 설립된 발렌티노는 전 세계에서 211개의 매장을 운영하면서 매출 14억유로(2022년 기준), 이익 3억5000만유로(이자·세금·감가상각비 차감 전 기준)를 거둬들였다.

장서우 기자 suwu@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