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6, 7년 전까지만 해도 ‘워라밸’이란 말이 유행했다. 마치 시대 가치이자 시대정신인 양 풍미했다. ‘일과 삶의 균형(work-life balance)’을 뜻하는 워라밸은 직업 선택과 행복의 기준이 됐고, 기업들도 앞다퉈 근무 여건과 복지를 개선했다. 평생 ‘회사형 인간’에 충실해온 고참 부장님들은 ‘칼퇴’를 하는 젊은 직원의 뒤통수를 쳐다보며 입이 간지러웠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회식합시다”란 말은 언감생심이었다.
워라밸은 ‘일에서 해방돼라. 그래야 비로소 나를 찾는다’라는 주문 같았다. 진정한 행복과 자아실현은 회사 문밖을 나가는 순간 시작되는 것이라고. 일과 삶의 균형이라기보다는 일을 줄이고 개인적 삶을 중시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두 영역은 마치 제로섬 게임처럼 대척 관계였다. 그런데 요즘 워라밸이라는 말을 듣기가 어려워졌다. 취업하기도 쉽지 않고 먹고살기가 빡빡해진 탓도 있을 것이다.
사실 일과 삶의 분리가 과연 가능한 건지, 그게 이상적인 건지에 대한 논란은 많았다. 얼마 전부터 서구에서는 일과 삶의 관계에 대해 새로운 개념이 대두하고 있다고 한다. ‘워라하’(work-life harmony), ‘워라블’(work-life blending), ‘워라인’(work-life integration) 같은 말들이 소개되고 있다. 셋 다 비슷비슷한 뜻으로, 일과 삶이 조화를 이루거나 혼합되고 통합되는 것을 의미한다. 워라밸에 대한 일종의 반작용이다. 일을 ‘노동’ 행위로만 여기지 않고 자신의 존재 이유와 자기 성장, 가족, 공동체, 취미와 여가 같은 가치들과 연결되도록 하는 것이다. 일의 리듬을 삶의 리듬으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워라밸은 ‘시간’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만 이 개념은 ‘가치’를 중시한다. 창의성과 생산성도 높아진다고 한다.
아마존 창업자 제프 베이조스는 한 강연에서 자신은 워라밸이란 말을 싫어한다며 ‘워라하’를 주장하고, 일과 삶은 실제로는 하나의 원(circle)이라고 말했다. 전자기기와 인공지능(AI)의 발달로 일과 삶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노트북으로 업무를 보고, 이동하면서 휴대폰으로 결재하고, 아이를 보살피며 재택근무를 하는 것은 일의 범주일까, 삶의 범주일까. 백세 시대로 가면서 직장과 일의 전통적 정의도 달라져 갈 것이다.
‘현대적 장인’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일을 통해 삶의 이유와 개인적 가치와 활력과 즐거움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백만장자라고 일을 안 할까. 노동에 대한 인식은 자아실현형, 관계지향형, 보람중시형, 생계수단형이 있다고 한다. ‘행복하게 일할 것인가, 불행하게 노동할 것인가’를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