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개발 바이오텍이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경쟁력은 연구개발 능력이다. 하지만 필요충분조건은 아니다. 임상 등 연구개발에 들어가는 천문학적인 자금을 조달하는 능력이 없으면 제아무리 뛰어난 약물도 허사가 되기 십상이다. 최근의 글로벌 투자 환경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카이스트 바이오경영대학원은 올 상반기 바이오혁신 경영포럼에서 금융 환경 진단과 대안을 다룬다.
한경바이오인사이트는 김석관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 선임연구위원(강남스타일 vs 보스턴스타일: K-Bio 길은 어디에?), 박현우 타임폴리오자산운용 심사역(IPO 그 이후: 국내상장시장에서 바이오섹터의 현주소), 스펜서 남 KSV글로벌 파트너(미국의 바이오산업 자본시장: 서부활극이 탄생시킨 유토피아), 이승우 데브시스터즈벤처스 상무(한국 바이오텍 성장모델과 벤처캐피털의 역할), 김태억 크로스포인트 테라퓨틱스 대표(빅파마 성장을 위한 금융생태계 진단과 모색) 등 포럼 강연자의 강연 내용을 연재한다.
한국의 바이오투자는 침체기에 있다. 그동안 국내 바이오투자는 무엇이 문제인지 진지하게 천착해 볼 기회가 없었다. 카이스트 바이오혁신 경영대학원에서는 매학기 바이오혁신 경영포럼을 진행한다. 이번 봄학기에는 한국 바이오 바이오 붐이 다시 찾아오길 기대하며 다섯 명의 전문가가 모인다. 한국 바이오투자의 문제점과 대안을 짚어보고, 새 길을 치열하게 찾는 자리를 마련했다.
이번 포럼의 문제의식은 다음과 같다.
2000년대 초에 있었던 IT붐인 닷컴버블은 꺼졌다. 하지만 한국의 정보통신산업은 지속적인 도약을 통해 세계 최고 반열의 반도체와 휴대폰 생산국이 됐다. 다만 IT에서도 소프트웨어는 포기상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이오는 가능할까.
한국 바이오의 가장 큰 애로사항은 돈이다. 지난해 글로벌제약사 미국 머크(MSD)의 연구개발(R&D) 지출은 약 40조원이다. 반면 한국은 10대 제약·바이오기업 R&D 지출의 합계가 1조3000억원 정도이다. 신약 하나 만드는데 평균 13년이 걸리고, 2조원 이상이 투입된다. 막대한 시간과 돈을 투자해도 실패할 가능성이 더 높다. 이 때문에 한국의 재벌기업들도 투자할 엄두를 못 낸다. 물론 제조업인 바이오시밀러나 위탁생산(CMO) 등은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이미 글로벌 경쟁력을 갖췄다고 평가한다.
바이오텍 투자의 재원 곧 파이낸싱 수단은 크게 라이선싱(기술수출), 공동연구, 벤처캐피털(VC), 기업공개(IPO)로 구분할 수 있다. 대부분의 한국 바이오텍들은 신약 임상 3상까지 진행할 돈이 부족하기 때문에 글로벌 제약사를 상대로 기술수출이 중요한 목표이다. 10년 전 한미약품이 희망의 횃불을 밝힌 이래 최근까지 한국 바이오텍의 기술수출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기술수출은 목표가 아니라 수단이다.
유망한 글로벌 바이오텍들은 공동연구를 통한 파이낸싱이 50퍼센트 정도이다. IPO나 유상증자에 비해 훨씬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공동연구의 경우 계약기간이 5년 이상이고, 이 기간 동안 꾸준히 R&D 자금이 수혈되므로 안정적인 자금운용이 가능하다. 더욱이 기술수출에 비해 연구결과에서 발생하는 IP(지적재산)를 자체자산으로 보유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이상적인 파이낸싱 수단이다. 물론 이는 충분한 기술경쟁력이 있어야 가능하다. 한국 바이오텍의 경우 공동연구를 통한 자금조달은 미미한 수준이다.
국내 비상장 투자시장은 VC가 주도한다. 통상 5~8년이 걸리는 상장 시까지 필요한 금액을 추정해 보자. 상장으로 가는 암묵적 필요 조건은 최소한 파이프라인(신약후보) 하나는 임상 1상인 상태여야 한다. 파이프라인의 종류에 따라 다르지만, 요즘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항체약물접합체(ADC)를 예로 들면, 전임상까지 300억원 내외가 소요된다. 파이프라인당 1상 진입 성공률은 3분의 1 정도이다. 하나의 파이프라인을 임상 1상에 진입시키는 데 900억원 이상이 필요한 셈이다.
미국의 경우 지난해 비상장 기업에 약 25조원이 투자됐다. 기업당 상장 전 평균 누적투자금액은 5000억원 정도다. 반면 한국은 2020년 전후 비상장 기업에 약1 조6000억원이 투자됐으나, 지난해에는 7000억원이 투자됐다. 기업당 상장 전 누적투자금은 1500억원에 못 미친다.
IPO를 통한 자본조달은 미국의 경우 2021년 100여개 업체, 20조원, 기업당 조달액은 2000억원 정도이다. 한국은 거의 유일한 Exit(투자회수) 경로가 IPO이다. 한국의 기업당 조달액은 300~500억원 내외로 추정된다. 임상 2상을 1개 이상 진행하면서 동시에 후속 파이프라인을 개발하는 비용을 IPO를 통해 조달한다고 하더라도 턱없이 부족하다.
상장 이후 투자시장의 경우, 미국은 Follow On(기업공개후 투자)이 2018년 기준 35조원으로 IPO를 통한 자본조달액 13조원보다 3배가량 높은 수준이다. 대조적으로 한국은 유상증자보다 메자닌(BW, CB)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 자본조달 기능이 원활히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 충분한 유상증자가 이루어지지 않는 원인을 규명해 볼 필요가 있다.
국내는 상장 이후 투자시장에서 VC의 역할은 제한적이다. VC는 상장 후 바로 탈출하는 게 보통이다. 미국의 경우 상장 후 의무보유기간이 6개월이지만 평균 3년 이상 보유한다. 미국과 한국의 이런 차이는 VC 보유지분의 크고 작음에서 오는 것일 수도 있다.
바이오 투자는 리스크가 클 뿐만 아니라 투자자와 바이오텍 사이의 정보 비대칭성이 크다. 투자자들이 전문성을 가지고 선택적으로 투자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과학 기술적 전문성뿐만 아니라 의약시장의 수요에 대한 전문성이 필요하다. 한국 바이오 투자시장의 가장 큰 문제점 중의 하나가 바로 선택 과정이 엄밀하지 못한 것이다. 즉 ‘묻지마 투자’이다. 바이오투자 재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을 생각하면 이는 심각한 문제다.
이런 관점에서 연간 시드(종잣돈)를 투자받는 기업 수는 적절한가. 미국의 경우 연평균 시드 투자와 IPO 기업 수의 비율은 4대1 정도로 알려져 있다. IPO에 의존하는 한국 바이오의 특수성을 감안해 연간 IPO가 10개라고 하고, 상장성공률을 3분의 1로 상정하면 30개의 시드 투자가 적절하다고 볼 수 있다. 그 이상은 시드 단계에서 걸러내야 한다.
상장기업에도 시장원리에 따른 엄밀한 선택이 적용돼야 한다. 미국의 경우 버블붕괴 시기와 붐 시기 상장기업체 수가 거의 2배 정도 차이가 난다. 한국의 상장 바이오텍은 150개 안팎이다. 도태돼야 할 상당수 기업이 좀비기업으로 생존하고 있다.
정보 비대칭성과 관련된 또 하나의 지표는 장기투자를 선호하는 기관투자자의 주식보유 비율이다. 기관투자자 비율이 대형 글로벌제약사는 평균 45%이고, 성장 중인 바이오텍 중 시가총액 6500억원 이상인 기업들은 평균 50%, 시가총액 1500~6500억원인 경우 25%, 시가총액 1500억원 이하인 경우 15% 정도이다. 한국의 경우 기관투자자의 비율이 10퍼센트 이하일 것으로 추정된다. 개인투자자들이 바이오 투자에 필요한 전문성이 취약한 것은 자명하다.
글로벌에서 대부분 바이오텍의 종착역은 인수합병(M&A)이다. 대개 신약 출시 이전에 인수합병이 일어나며, 인수자는 자금이 풍부한 글로벌 제약사다. 미국 바이오텍의 M&A까지 소요되는 기간은 창업 후 6~10년 정도다. 글로벌 제약사가 없는 한국의 경우 최근 바이오텍이 재벌그룹이나 중견그룹에 인수되는 경우가 생겨나고 있다. 그러나 인수자가 충분한 R&D 자금을 공급하기는 힘들 것이다.
바이오텍의 파이낸싱 경로가 다변화해야 필요는 분명하다. 이를 위한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바이오투자가 되살아나려면 IPO, 기술수출, 인수합병, 신약 출시 등의 이벤트가 있어야 한다.
한국은 IT 강국이지만 바이오산업에서는 갈 길이 멀다.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한국 바이오산업이 여기까지 왔다는 것도 15년 전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다. 아직 그 길이 잘 보이지 않지만 20년 후 한국의 바이오산업은 세계 수준에 도달해 있을 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