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세 시대는 원하든 원치 않든 현실이 돼가고 있다. 수명 연장으로 그만큼 길어진 인생 후반부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무엇을 챙겨야 할까. 과학자들은 ‘근육’이라고 답한다. 근육이 없으면 일상 활동에 제약을 받고 건강한 삶을 유지하기 어려워지는 탓이다. 미국 머크(MSD), 노바티스 등 글로벌 대형 제약사들이 근감소증 치료제 개발에 앞다퉈 뛰어든 배경이다.
80대 근육량은 20대의 ‘절반’근감소증 치료제 분야의 선두주자는 세계 25위권 제약사 리제네론이다. 지난달 미국 뉴욕 사무실에서 만난 데이비드 글래스 노화질환 연구담당 부사장(사진)은 ‘깁스’로 운을 뗐다. 글래스 부사장은 “다리에 깁스를 하다 풀면, 다치지 않은 다리에 비해 근육이 많이 빠져 얇아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며 “20대에는 2주만 지나도 근육량이 쉽게 회복되지만 70~80대에게는 큰 문제(big deal)”라고 말했다.
근육량은 대개 20대 중반에서 30대에 정점을 찍은 뒤 매년 1~5% 줄어든다. 70대 이후부터는 줄어드는 속도가 급격하게 빨라지고, 80대에는 20대 근육량의 절반 정도만 남게 된다. 근육이 빠지면 디스크나 관절염에 걸릴 위험이 높아진다. 자연스럽게 외부활동이 줄어들면서 치매 등 노년 질환이 빠르게 진행되기도 한다. 가장 기본적인 해결법은 근력운동이다. 하지만 노년기에는 높은 강도의 운동이 쉽지 않다. 글로벌 제약사들이 그 대안책으로 찾고 있는 게 근육량을 늘려주는 약이다. 아직까지 미국 식품의약국(FDA) 등 규제기관의 정식 허가를 받은 근감소증 치료제는 없다.
근감소형 비만 치료藥 개발 속도한 해 매출의 30% 이상을 연구개발(R&D)에 투자하는 리제네론은 근손실로 인한 여러 문제 중에서도 ‘근감소형 비만’ 치료제 개발에 집중하고 있다. 근육이 빠진 자리에는 지방이 채워지기 쉽다. 쉽게 근육량이 회복되지 않는 노인들은 더욱 그렇다.
글래스 부사장은 “당뇨·비만약을 투약하다가 중단하면 지방은 다시 채워지지만 근육은 그렇지 않다”며 “비만 고령층에게 근육이 아닌 지방 조직만 없애게 하는 것이 우리 목표”라고 설명했다. 이어 “근감소증과 비만을 결합한 동물실험 연구 데이터는 아직 많지 않다”며 “현재 연구 콘셉트를 잡고 체계적인 동물실험을 준비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임상 어렵지만…“개발해낼 것”
그간 근감소증 치료제를 개발하기 위한 시도는 여럿 있었다. MSD는 2007년 시작한 임상 2상에서 가짜약 그룹과 유의미한 차이를 보이지 못해 임상을 중단했다. 노바티스도 65세 이상 성인을 대상으로 임상을 진행해 근육량 및 보행속도 증가를 확인했으나 통계적 유의미성을 확보하는 데는 실패했다. 글래스 부사장은 “근감소증을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서는 근육 회복이 곧 근력 강화를 의미하는 것인지에 대한 논쟁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며 “다만 확실한 것은 근육이 없어지면 사람이 약해진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당뇨·비만치료제 ‘붐’에 힘입어 글로벌 제약사들은 다시 근감소증 치료제 개발에 공을 들이는 추세다. 당뇨·비만치료제의 대표적 부작용 중 하나가 근손실이기 때문이다. 미국 일라이릴리는 근감소증 치료제를 개발하다가 임상에서 고배를 마신 버사니스바이오를 약 2조4000억원에 인수했다.
글래스 부사장은 “(약 개발 완료) 예측 시점에 대해선 말할 수 있는 것이 없다”면서도 “근감소형 비만 치료제 개발에 굉장히 집중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고 했다.
뉴욕=남정민 기자 peux@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