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을 앞두고 갑자기 전공과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요. 정확히 뭘 좋아하는지 모르겠습니다."
25살 미대생 작성자 A씨가 '당근' 동네 생활에 올린 게시글은 6700명이 읽고, 58개 조언글이 달렸다. 정년퇴직한 60대부터, 같은 전공 출신의 직장인, 전문 진로 상담가까지 등판했다. 악플 하나 없이 진심이 가득 담긴 조언이었다. 이들은 힘이 되는 응원의 글을 남기는가 하면 진로 검사나 여행을 권하는 등 실질적인 충고까지 남겼다.
중고거래 플랫폼으로 대중에게 익숙한 '당근'이 최근 들어 '동네생활' 기능으로 최근 주목받고 있다. 동네생활은 이용자가 이웃들과 자유로운 이야기를 공유할 수 있는 일종의 온라인 커뮤니티다.
이사하면 동네생활부터 열어본다는 20대 이모 씨는 "이사 직후 맛집과 미용실을 찾을 때 써봤다"며 "동네 인증을 한 주민들만 사용하는 온라인 커뮤니티라 신뢰할 수 있고, 다른 커뮤니티 대비 이용자 연령대가 다양한 것 같다"고 이용 후기를 전했다. 이어 "오프라인으로 치면 사랑방 같은 느낌"이라고 부연했다.
실제 당근이 6일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올해 1월 1일부터 두 달간 동네생활에 올라온 게시글의 키워드 중 '맛집'은 2위를 차지했다.
치매를 앓던 부모님을 당근으로 찾은 사례도 있다. 2021년 서울 강북구 번동에서 치매를 앓던 60대 어머니 노모 씨가 사라지자 40대 딸 김모 씨는 경찰 신고, 전단지 제작과 함께 당근에도 글을 올렸다. 사라진 어머니 얼굴을 알아본 인근 주민이 경찰에 신고해 노 씨를 찾을 수 있었는데, 이때 주민은 당근의 글을 보고 얼굴을 알아봤다 밝혀 화제 된 바 있다.
최근에는 진솔하고 개인적인 이야기를 담은 고민 상담 글이 많이 보인다. 고민과 관련된 업계의 종사자들이 직접 답변을 달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고3 아들이 공부 안 할 때 부모님이 어떤 말을 해줘야 할까요"라는 학부모의 글에는 학원 선생님의 조언부터, 대학생 자녀를 둔 학부모의 경험담까지 수십 개의 댓글이 달렸다.
"아빠가 당뇨와 고혈압으로 쓰러지셨다"며 걱정하는 고등학생의 글에는 간호사가 당뇨인 습관 관리법을 남기는가 하면, 이웃 주민들이 댓글에 대뜸 연락처를 남기거나 채팅으로 말을 걸어달라며 도움의 손길도 내밀었다.
30대 직장인 박모 씨는 동네생활에 올라온 고민 글에 댓글을 남겨본 적이 있다며 "온라인 익명 커뮤니티인데도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정성스러운 댓글을 남겨 놀랐다. 보면서도 나도 위로받았다"며 "익명이긴 하지만 한동네에 사는 사람이라는 점이 친밀감을 형성하는 데 도움된 것이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심리학 전문가들은 익명 공간에서 내밀한 이야기를 털어놓는 현상에 대해 '기차에서 만난 이방인 현상'을 언급했다. 되려 매일 만나는 가족이나 친구에게는 약점으로 작용할까 봐 우려스럽거나 혹은 상대에게 부담을 지우는 것 같아 털어놓지 못하는 고민을 도리어 '처음 만난 사람이라서' 낯선 이에게 거리낌 없이 털어 놓게 된다는 설명이다.
임명호 단국대 심리학과 교수는 기차에서 만난 이방인 현상과 관련, "특히 온라인 소통에 익숙한 M·Z·알파 세대는 온라인으로 내면의 이야기를 주고받는 데에 거부감이 없다"며 "온라인을 통한 소통은 단순 정보 공유를 넘어 앞으로도 더욱 심도 깊어질 것"이라고 부연했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익명이 보장된다고 해도 '이웃 주민'이라는 공통점이 신뢰를 형성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악플을 다는 사람들은 나와 아무 관계 없는 사람에게 자신의 스트레스를 마구잡이로 해소하기 위해 그런 행동을 하는데, 한 동네로 묶이는 순간 관계성이 부여되면서 섣불리 악의적인 마음을 품을 수 없게 된다"고 진단했다.
김영리 한경닷컴 기자 smart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