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모순적인 존재다. 내일이 오늘과 다르기를 갈망하는 한편, 오늘의 익숙한 일상이 깨어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변화의 물결에 맞서 오늘을 이루는 가치와 요소들을 어떻게 지킬지에 대해 고민하는 이데올로기가 보수주의다.
부자와 기득권층을 위한 것으로 종종 폄하됨에도 보수주의가 근대 이후 광범위한 호소력을 유지해온 것은, 그 철학이 이 같은 인간의 소박한 본성에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보수주의 사상 전반을 종합하고 소개한 에드먼드 포셋의 <보수주의>가 ‘전통을 위한 싸움’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유다.
책은 근대 정치사상이 태동한 18세기의 에드먼드 버크부터 최근 미국에서 강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트럼프주의에 이르기까지 보수주의 사상 전반을 소개하고 있다.
확립된 제도와 양식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 보수주의인 만큼 다른 정치사상처럼 개념을 정의하기는 어렵다. 결국 보수라는 단어에는 인류가 거쳐온 갖가지 신념이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저자가 일관된 사상 체계를 설명하기보다 각 인물을 통해 일종의 열전 방식으로 보수주의를 소개하려 하는 이유다.
이 같은 난점을 돌파해 보수주의에 다가서기 위해 저자는 통사적 접근을 시도했다. 주석과 부록을 제외하고도 600페이지가 넘는 ‘벽돌책’인 <보수주의>에는 미국과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서구 여러 나라와 수백 년의 시간을 배경으로 수십 명의 사상가와 정치가가 등장한다. 그럼에도 내용 전개가 난잡하거나 산만해 보이지 않는다. 보수주의의 기저에 깔려 있는 두 가지 핵심 화두를 중심으로 논의를 이어가기 때문이다. 바로 ‘과거로부터 무엇을 지킬 것인가’, ‘미래로의 변화 과정에서 어느 정도까지 수용할 것인가’이다.
지키려 하는 것 자체가 끊임없이 바뀌어온 만큼 보수주의는 시대와 장소에 따라 모습을 달리해왔다. 근대 초기 보수주의자들이 지키려 노력했던 왕권과 지주들의 이익, 종교적 삶 등이 이제는 거의 사라져 버린 것이 단적인 예다. 전근대적 생활방식을 지키기 위해 18세기 보수주의자들이 저항했던 자본주의를 20세기 보수주의자들은 재산권 옹호를 목적으로 적극 전파했다.
이처럼 ‘오늘을 지키려는 싸움’은 낡고 곧 사라질 것들을 위한 투쟁으로 폄하되지만 사회의 구조를 이해하면 그렇지 않다. 사회 구성원들은 공통적인 문화 및 물질적 기반 위에서 소통하고 서로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확고한 가치관을 갖지 못한 채 변화에 이리저리 휘둘리며 불안해한다. 여기서 길잡이 역할을 하는 것은 신중하게 구성된 제도와 관습이다. 귀찮다는 이유로 이를 벗어던지는 순간 사회는 폭력적인 독재나 대중의 광기에 내팽개쳐진다는 것이 20세기 역사를 통해 증명됐다.
그렇기에 어떤 것을 지킬지는 보수주의에서 중요한 질문이 된다. 잘못된 것을 수호하려 나서면 혁신의 발목을 잡고, 소수자 등 다른 사회 구성원에게 폭력적이 될 수 있다. 도널드 트럼프를 비롯한 현대의 ‘강경우파’가 자유무역과 인종 다양성에 부정적인 것은 백인 중심의 전후 생활양식을 지켜야 할 것으로 설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수주의가 수세적인 방식을 넘어 사회를 이끄는 과정에선 어떤 것을 수용할지에 대한 판단이 관건이 된다. 1980년대의 로널드 레이건과 마거릿 대처가 그랬듯 확고한 가치를 중심에 두고 질서 있는 변화를 추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지 등에서 30여 년간 기자로 활동한 저자는 자신을 ‘좌파 자유주의자’로 규정한다. 자신의 정치적 신념과 경쟁하는 이데올로기를 소개하는 차원에서 책을 저술했다. 보수주의에 대한 애정이 적은 만큼 중요 논점들을 파고들기보다는 훑고 지나간 경우가 많다. 보수주의 석학 러셀 커크가 1953년 출간한 <보수의 정신>에서 보여준 진지함이 아쉬운 대목이다. 다만 <보수주의>는 1950년대 이후 현재까지 보수주의 운동의 모습과 이념 내부의 주요 변화를 충실하게 담고 있다는 장점도 있다.
해방과 6·25전쟁을 통해 기존 질서와 전통이 대부분 무너진 이후 건설된 대한민국에서 보수주의를 정의하기는 더욱 어렵다. 1970년대에야 본격화된 산업화를 보수와 등치시키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이런 가운데 우리 사회는 인구 감소와 인공지능 혁명 등으로 커다란 사회적 변화를 앞두고 있다. 우리는 질서 있는 변화를 위해 무엇을 지키고, 어떤 것을 변화시킬 것인가. <보수주의>에 대한 독서를 통해 시작할 고민이다.
노경목 기자 autonom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