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쎄요. 제가 뭐라고 얘기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튼 좀 ‘거시기’하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총선 공천을 둘러싼 정치권 갈등이 커지던 지난달 ‘정치 9단’으로 불리는 이가 한 방송에서 한 촌평이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거시기’다. 우리말에서 콕 집어 말하지 않아도 말하는 이나 듣는 이가 서로 알아듣는 말이 있다. 대표적인 게 ‘거시기’다. 의미가 분명하지 않은데도 대충 뜻이 통하니 마법의 말이라 할 만하다.호남 사투리가 널리 쓰여 표준어가 돼우리말에는 모호하지만 그런 대로 뜻이 통하는 말이 꽤 있다. 지난호에서 살핀 ‘최근’을 비롯해 ‘거시기, 눈높이, 적당히, 1년째, 주말/주초, 반나절’ 따위가 그런 범주에 드는 말들이다. “여그 거시기는 한마디로 머시기할 때꺼정 거시기한다!” 오래전 영화 <황산벌>에서 백제 진영을 염탐하던 신라군은 ‘거시기’가 암호인 줄 알았다. 당황한 신라군은 암호 전문가까지 불렀지만 도저히 풀지 못했다. 호남 방언이던 이 말은 <표준국어대사전>(1999)에 등재되면서 비로소 표준어 대접을 받게 됐다.
하지만 일상에선 널리 쓰여도, 신문에선 여간해서 보기 어렵다. 기피어이기 때문이다. 막연한 의미를 담은 말이라 그렇다. ‘거시기’는 이름이 얼른 생각나지 않거나 바로 말하기 곤란한 사람 또는 사물을 가리킨다. “우리 동창, 거시기 말이야. 키 크고 늘 웃던 친구.” 이때 쓰인 ‘거시기’는 대명사다. 군소리로 쓰일 때는 감탄사다. “저기, 거시기, 길 좀 물어봅시다.” 이때의 ‘저기’나 ‘거시기’, 이런 게 군소리이고 군말이다.
‘눈높이’도 ‘거시기’ 못지않게 막연하면서도 뜻이 통하는 유용한 말이다. ‘정치의 계절’인 요즘 이 말은 거의 무소불위로 쓰이는 것 같다. ‘국민 눈높이에 맞는 공천’, ‘청소년 눈높이에 맞춘 교육’, ‘시민 눈높이에 맞는 청렴한 인물’ 등 그 쓰임새에 막힘이 없다.학습지 브랜드로 널리 알려진 우리말‘눈높이’는 애초 물리적인 높이, 즉 ‘수평으로부터 관측하는 사람의 눈까지의 높이’를 나타내는 말이다. 100여 년 전에는 이런 의미로 쓰였다. 그러나 점차 의미가 확대되어 ‘어떤 사물을 보거나 상황을 인식하는 안목의 수준’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게 됐다. 그런 쓰임새가 자리 잡게 된 계기가 바로 대교그룹 ‘눈높이’ 학습지의 탄생이다.
1980년대에 ‘공문수학’이란 브랜드로 우리나라 학습지 시장을 키운 곳이 대교다. 불모지나 다름없던 시장을 개척해 절대강자로 자리 잡고 있던 즈음 일본 구몬수학은 대교에 ‘공문’이라는 이름 대신 일본식 발음인 ‘구몬’을 쓰도록 압박했다. 대교는 고민 끝에 구몬과 결별하고 1991년 독자 브랜드를 내놓으면서 새롭게 출발했다. 그렇게 나온 게 ‘눈높이’ 브랜드다.
‘눈높이’ 시리즈의 선풍적 인기는 우리말에도 큰 영향을 줘 단어의 의미 확장을 가져오기에 이르렀다. 1991년 <표준국어대사전>이 이 말을 표제어로 다루면서 드디어 사전에 올랐다. 그전까지 대표적 국어사전이던 <국어대사전>(민중서림, 1982)에서도 이 단어는 다루지 않았다.
학습지로서의 ‘눈높이’는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배우는 학습자 중심의 교육’이란 의미를 담은 말이다. 공급자에서 수용자 중심으로의 전환을 담아 당시로서는 획기적 개념이었다. 가령 ‘학생 눈높이’라고 하면 자연스레 학생의 안목에서 바라본다는 의미를 띠었다.
그런데 요즘 들어, 특히 정치권에서 남발하는 ‘눈높이’는 외려 공급자 중심으로, 자의적·주관적 용도로 역주행하는 느낌을 줘 안타깝다. 가령 “국민 눈높이에 맞춘 혁신 공천으로 공천 혁명을 이뤄냈다”고 자화자찬하는 식이다. 사실은 끊임없는 잡음과 분란을 일으키니, ‘눈높이 공천’은 국민을 현혹하는 수사에 불과할 뿐이다. “국민 눈높이에 맞게 하면 된다”라고도 한다. 하지만 그 눈높이가 어느 정도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주관적으로 말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서로 통한다고 착각하게 하니, 앞으로도 이 말의 쓰임새를 주목해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