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시아는 ‘동양의 실리콘밸리’로 불린다. 세계 6위 반도체 수출국이며, 반도체를 검사하고 조립하는 후공정 시장의 13%를 차지하고 있다. 1972년 인텔이 공장을 세우면서 반도체산업이 싹트기 시작했다. 중국과 베트남에 공장을 뺏기며 한동안 고전했지만 다시 해외 투자가 물밀듯 들어오고 있다.
변화의 물꼬를 튼 계기는 미·중 무역분쟁으로 글로벌 기업들이 중국을 대체할 생산기지를 찾으면서다. 반도체 생태계가 이미 조성돼 있고 물류·전력 인프라도 잘 갖춰져 있다.
지난해 반도체 클러스터가 있는 말레이시아 북부 도시 페낭에 대한 외국인직접투자(FDI)는 128억달러(약 16조8000억원)를 기록했다. 2013년부터 2020년까지 더한 금액보다 많다. 인텔은 70억달러를 투자해 페낭과 인근 도시 쿨림에 첨단 3D(3차원) 패키징 공장과 조립 라인을 건설하고 있다.
마이크론은 지난해 두 번째 생산 공장을 가동했다. 차량용 반도체 1위 업체 인피니언테크놀로지스는 54억달러를 투자해 세계 최대 전기차용 반도체 공장을 짓고 있다. 한국 기업으로는 반도체용 인쇄회로기판(PCB) 제조사인 심텍이 2022년 페낭에 공장을 완공하고 증설을 추진하고 있다.
중국 기업도 대중 규제를 우회할 목적으로 말레이시아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현지 통계에 따르면 현재 페낭에는 55개 중국 기업이 사업을 하고 있다. 미·중 분쟁이 시작되기 전에는 16개에 불과했다. 화웨이 계열사였던 X퓨전은 말레이시아 네이션게이트와 제휴해 그래픽처리장치(GPU)를 생산하기로 했다. 반도체 설계업체인 스타파이브도 페낭에 거점을 구축하고 있다. GPU와 반도체 설계는 인공지능(AI) 서버 구축에 없어서는 안 될 핵심 사업이다. 우리가 미국, 대만, 일본의 반도체 약진을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지켜보는 동안 ‘제조업 변방’으로 알고 있던 말레이시아에서 뜻밖의 반도체 발흥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그러고 보니 베트남과 인도의 반도체 생산·수출도 조금씩 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당연한 것 같기도 하다. 한국이 지난 30년간 반도체로 엄청난 돈을 벌어들인 것을 그들이라고 몰랐을 리 없기 때문이다.
박의명 산업부 기자 uimy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