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미국 실리콘밸리 특파원으로 부임했을 때 놀라운 점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그중 하나는 현지 기업에서 일하는 한국인 엔지니어가 생각보다 많다는 것이었다. 구글 등 빅테크와 인텔 같은 반도체 기업, 전기차 업체 테슬라엔 적게는 수십 명, 많게는 1000명 가까운 한국인이 일했다. 샤오펑, 니오 같은 중국 전기차를 알게 된 것도 현지 법인에 근무하는 한국인을 만난 뒤부터였다.
한국인 엔지니어들의 출신 배경도 예상 밖이었다. 미국 캘리포니아공과대(칼텍), 스탠퍼드대 등 명문대에서 박사를 마치고 바로 취업한 사람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한국 대기업 출신이었다. 그중에서도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LG전자 등 한국 기업 본사 근무 경력을 인정받고 미국으로 건너간 엔지니어가 많았다.
실리콘밸리 엔지니어 생활이 순탄치만은 않다는 게 만나본 한국인들의 공통된 얘기였다. 백인은 한국인을 ‘시골 촌뜨기’ 취급하고, 인도인과 중국인들은 똘똘 뭉쳐 한국인을 견제한다고 했다. 의사소통이 편치 않으니 할 말을 다 하지도 못하고.
그래도 아등바등 버티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첫 번째는 한국보다 월등하게 좋은 근무 환경이다. 웬만한 한국 기업보다 2~3배 많은 연봉에 글로벌 정보기술(IT) 산업의 최첨단에 서 있다는 자부심, 기술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포부 등이 이들의 버팀목이 된다. 여기에 자녀들에게 살아있는 영어를 배울 기회를 주고, 큰 세상을 보여준다는 만족감도 크다고 했다. 이런 메리트 때문에 지금도 적지 않은 한국의 우수 엔지니어가 ‘미국 이직’을 준비 중이다.
한국 핵심 엔지니어들의 미국 이직은 국가 경쟁력에 타격을 줄 수밖에 없다. 2000년대 초반 한국 기업을 인수하고 엔지니어를 유치해 패권을 쥐게 된 중국 디스플레이 산업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렇다고 국가가 나서 이직을 원천 차단하는 건 불가능하다. 최근 법원의 전직 금지 가처분 인용으로 알려진 SK하이닉스 개발자의 마이크론 이직 사례처럼 위법 행위는 엄단해야 하지만, 법을 어기지 않고 미국으로 가는 엔지니어들을 막는 건 기본권 침해다.
인재 유출을 막는 해법은 하나뿐이다. 한국을 실리콘밸리에 못지않은 ‘엔지니어들의 천국’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엔지니어에 대한 처우를 개선하는 건 물론 이들을 존중하는 사회 분위기도 조성해야 한다. 이런 노력이 쌓여야 ‘국가 대항전’ 형태로 진행 중인 글로벌 인공지능(AI)·반도체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 ‘한국의 제2 전성기’는 엔지니어가 의사보다 더 많은 보상을 받는 시스템이 구축될 때 오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