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에 남아야 할 이유, 떠나야 할 이유를 생각해 봤다 [점프의 기술]

입력 2024-03-05 16:55
수정 2024-03-05 16:56


여전히 업계 사람들을 처음 만나면 ‘그 회사는 사람 정말 사람 안 뽑는데 어떻게 간 거에요?’ 라는 말을 듣는다. 실제로 지금 나의 회사(이하 A사)의 PR/대외협력 채용공고가 떴을 때 많은 업계 관계자들이 ‘가고 싶은 회사'라 입을 모아 말할 정도였으니. 어떻게 지원하면 좋을지 조언을 구하는 분도 있었고, 그중엔 정말 지원한 사람도 있었다.

3년 전 A사의 채용공고가 올라왔을 때 처음 든 생각은 ‘이거 내가 하고 있는 딱 그거잖아?’였다. 하지만 이전 회사에서 이미 즐거운 경험, 새로운 시도를 많이 하고 있었기에 이직을 해야겠다는 확고한 마음이 들진 않았다. 또 채용공고 문구에서 계속 되뇌이는 말이 있기도 했다.



스스로 내성에 강한 편이라고 느끼지만 A사 입장에선 유약한 것일 수 있겠다 싶어 금세 이 공고를 잊어버렸다.

그렇게 두 달쯤 지났을까? 페이스북 메시지가 와 있었다. A사의 파트너였다. 파트너는 대학시절 잠시 일했던 스타트업에서 인연이 되었던 분이다. 연락을 하고 지내진 않았지만 업계서 퍼스트펭귄으로 여러 업적을 쌓아온 분이기에 먼 발치에서 응원하는 분이기도 했다. 열어본 메시지의 첫 마디 아주 짧고 강렬했다.

“인혜님 잘 지냈어요? 왜 A사 지원 안했어요? 기다렸는데!”

이직 때마다 피어 오르는 ‘이회사 뭐지, 궁금해!’ 버튼이 작동했다. 짧은 문장에 서론,본론,이유가 다 담겼다. 궁금함을 못참고 답장을 했고 커피챗을 했다. 또 면접 아닌 면접을 보며 여러 질문을 듣고 여러 생각을 이야기했다. 점점 A사의 매력에 빠졌고, 곧 팀원들과의 면접이 잡혔다. A사와 그 당시 근무하던 회사의 성격이 비슷하다고 생각했기에, 어떤 점이 다를지 묻자 돌아온 대답은 ‘거절할 일이 많아질 거에요.’ 였다.

커피를 마시고 돌아와 며칠간 ‘‘남아야 할 이유와 이직해야 할 이유'를 생각했다.

지금 회사에 남고 싶은 이유는 1)적응을 마쳤다 2)아는 사람들이라 일하기 편하다 3)무엇을 하든 반대가 없다 4)거절할 일도 없다 였다. 그리고 이직을 하면 얻는 것은 1)새로운 환경을 알게 된다 2)모르는 사람을 알게 된다 3)반대 의견을 들을 수 있다 4)거절을 경험할 수 있다 였다. 3,4번은 난이도가 아주 높은 것이기에 이직을 포기하는 사유가 될 수도 있었지만 문득 스스로 스트레스와 거절 역치를 알고 싶었기에 새 환경에 던져봐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돌이켜보면 이전에 다니던 회사들에선 거절보단 승낙이 쉬웠다. 마음이 편하려고, 또는 짧게보면 그게 일하기 편하니까 응하고 수락했던 것들이었다. 중간에서 조율하느니 결정을 토스하는 게 더 쉬운 일이니까. 상대방은 내가 전문가라 생각해서 믿고 ‘할게요'라고 했던 일들이, 사실은 조금만 합당한 이유를 찾으면 안해도 되는(그리고 그 에너지를 더 생산적인 것에 쓸 수 있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처음 A사에 들어와 이 답을 찾느라 꽤나 헤맸다. ‘이직 괜히 했나?’ 라는 마음이 문득 들기도 했다. 몇 달간 스트레스를 받았고 거절과 무응답에 쉽게 마음을 다쳤다.

동시에 오기도 생겼다. ‘이것도 못해내면 진짜 난 딱 그만한 그릇밖에 안된다’는 마음으로 어떻게든 스트레스와 거절에 대해 상처받지 않고 감정을 제자리에 돌려놓으려고 노력했다. ‘거절은 나의 인격을 해하기 위한 게 아니다. 이 일이 그만큼 상대방에게 안 중요한 거다. 그리고 나도 상대방에게 안된다고 말할 줄 알아야 한다’라고. 돌이켜보면 이직의 모든 과정은 나의 회복탄력성을 기르는 훈련이기도 했다. 소비된 감정을 남탓과 회사탓 하며 부정적으로 돌려보기도 했고, 무기력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결국 ‘이건 건강한 방법이 아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도, 이직 덕분이었다.

몇 차례의 이직으로 꽤 학습된 덕일까? 이제는 왠만한 무례한 요청에도 웃으며 이유있는 거절을 하게 되었고, 무조건적 수용도 덜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오는 스트레스에 대해서도 꽤나 역치가 높아졌다. 이제는 거절과 스트레스를 마주했을 때 ‘오히려 좋아, 가보자'라는 퀘스트를 해결하는 긍정적 사고로 바꾸며 이른바 회복탄력성을 기르고 있다.

많이 시도하고 실패하고 단련되어 보세요. 후회하지 않을 거에요
최근 시장에서 내가 속한 업에 변화가 포착되고 있다. 근 몇 년 전만 해도, 대기업과 스타트업의 PR에서 요구되는 커뮤니케이션 역량이 달랐다. 예를 들면 대기업의 경우 귀속한 조직에서 주어진 업무를 뾰족히 단련해나가는 것이었다. 이미 인지도를 단단히 쌓았기에 회사 정책과 리스크 관리 차원의 거절과 침묵은 아주 중요한 업무수행능력이기도 했다. 그러나 스타트업의 경우 시장에서의 인지도를 높이는 게 더 중요하기에 거절보단 수용, 대화, 기꺼이 외부로 나가서 알리는 태도가 더 필요했다.

하지만 최근 몇년 사이 자본 시장은 얼어붙기 시작했다. 오퍼레이션의 불안정성이 커지고 복잡한 규제 복잡성 역시 높아졌다. 복잡한 외부 상황을 마주한 스타트업은 더이상 스타트업으로 머물 수 없고 앞선 기업들이 전차를 밟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리스크를 방어하거나, 또는 회사의 입장을 투명히 알리는 커뮤니케이션 역량이 필요해졌다. 실제로 시장이 어려운 최근 PR에이전시와 PR인력 채용은 증가하고 있다. 기업의 입장을 부드럽지만 명확하게 표현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IT기업, 스타트업들은 대기업보다 회복탄력성 측면에서 더 단단하다. 안해본 것을 두려워 하지 않고 시도하며 새로운 변화를 주도하고 있다. 이 부분은 대기업이 구조적 한계로 익히기 어려운 문제다. 스타트업 PR과 커뮤니케이션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빠르게 바뀌는 방향과 입장에 기민하게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대기업이라고 생각했던 회사가 구조적 한계로 커뮤니케이션 골든 타임을 놓쳐 사회적 질타를 받는 경우도 종종 목도할 수 있다.

대기업과 스타트업, 두 곳을 동시에 경험할 순 없다. 가능한 많은 도전과 경험을 스스로에게 제공할 수 밖에. 결국 이직은 남들과는 다른 확장성을 가질 수 있는 무기다. 무엇이든 들어가서 겪어봐야한다. 새로운 환경에 나를 내던졌을 때, 크고 작은 실패와 거절과 적응, 설득들을 발판 삼아 도약할 수 있는 근력을 길러야 한다. 길러진 근력은 언젠가 또 쓰인다.

길게 가려면 거절할 일도, 거절 당할 일도 많다. 덜 중요한 것은 거절하고 더 중요한 것에 집중해야 한다. 이건 이직에 국한된 것이 아닌, 나 자신이란 인간의 성장에도 필요하다. 모르는 것, 배워야할 것, 업의 심연을 넓혀나가는 과정을 겪어야 회복탄력성이 길러진다.

오늘도 취업 커뮤니티에 ‘워라밸과 연봉은 어떤가요?’ 라는 질문을 남기고 있다면 이젠 프레임을 바꿔 생각해보자. ‘회복탄력성을 기를 수 있는 곳인가요?’인지. 그리고 부탁드립니다. 오늘도 많이 시도하고 실패하고 단련되어 보세요. 후회하지 않을 거에요!

정인혜 님은 ‘88 올림픽 봤겠네’의 단골인 88년생으로, IT,스타트업 이야기를 대신 고민하고 전하는 일을 하고 있다. 커뮤니케이션을 업으로 삼은지 12년차. 현재 한 투자사에서 제일 투자답지 않은 일을 맡은 그녀는 글보다 말을 선호하지만 기억은 기록이 되기에 가끔 글을 쓰고 있다.

강홍민 기자 kh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