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께서 원하신다. (Deus le volt)”
1095년 11월 27일. 프랑스 클레르몽에서 교황 우르반 2세의 연설을 듣던 군중들은 어느 순간부터 한목소리로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신의 영광’을 지상에서 구현하기 위한 열정이 운집했던 군중들을 휘감았다.
군중들을 자극한 우르반 2세의 연설은 튀르크인들의 침입으로 곤란을 겪고 있는 동방 기독교도들을 도와야 하며 더는 이교도가 동방의 기독교 영지를 침입해 성지와 교회를 휩쓸고 다니는 것을 내버려 둘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교황의 열변을 들은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전체 기독교 세계가 동방을 구원하기 위해 진군해야 한다고 느꼈다. 모두가 예루살렘으로 떠나야 한다는 생각에 휩싸였다. 그들은 이제 내부에서 치고받고 싸우며 살육과 분쟁을 이어가던 것을 멈추고 ‘올바른 전쟁’. 즉 신을 위한 일에 나설 것이었다.
이처럼 십자군 전쟁의 종교적, 정신적, 감성적인 것으로 촉발됐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일을 따져보면 그 배경엔 경제적 요인이 자리 잡고 있는 법. 중세 유럽인들이 그처럼 대외 공격·팽창의 목소리에 쉽게 감응하고 그런 공격적인 움직임이 오래 지속된 데에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당시 유럽은 인구가 빠르게 늘기 시작하던 때였다. 온난한 기후와 삼포제 등 농업기술의 개선 덕에 농업생산량이 늘어난 영향이었다. 자연스럽게 11세기 말에서 13세기 말까지 진행된 십자군 전쟁의 전 기간은 유럽의 인구가 증가하던 때와 겹쳤다.
인구 관련 사료가 상세하게 남아있는 잉글랜드의 경우, 12세기 하반기 0.2%였던 연평균 인구증가율은 13세기가 되면 0.75%로 상승했다. 12세기 프랑스의 연평균 인구증가율이 0.39%, 독일이 0.48%로 추정되는 데 이들 지역도 비슷한 인구 증가 추세를 보였을 것이란 게 역사학자들의 추산이다.
이처럼 갑자기 인구가 늘면서 더 많은 식량이 필요하게 됐다. 가축과 목재, 토탄(土炭) 등도 더 많이 요구됐다. 반면 이들 자원을 공급할 농지는 점점 부족해져 갔다. 생산성 증대가 미약했던 전근대 시대에는 한정된 지역에서 부양할 수 있는 인구 규모에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사회적으로 높아진 인구압을 해소할 필요성이 점점 커졌다. 이는 대외 팽창, 혹은 대규모 인구 이주라는 형태로 해결책을 찾았다. 성지 예루살렘으로 향한 십자군뿐 아니라 스페인 지역에서의 레콘키스타, 슬라브족이 거주하는 동방의 이교도 지역으로 게르만계 집단의 이주 등은 모두 높아진 인구압을 해소하기 위한 밸브 역할을 했던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십자군 원정에 따른 대규모 병력 이동은 기존 지중해 지역에서 활약했던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교역망을 더욱 원활하게 작동케 하는 효과도 있었다. 당시 지중해 동부 지역에선 향신료와 비단, 상아, 유리 등 사치품을 중심으로 한 상업 교역이 활발하게 진행됐고, 이들 상업망의 상당 부분은 아말피와 나폴리, 살레르노, 바리, 피사, 제노바, 베네치아 등이 담당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슬람 세력의 흥기로 인해 이탈리아 상인들의 주도권이 위협받기 시작하던 순간에 십자군 운동이 불거지면서 이탈리아 상인들은 외부 위협을 극복할 새로운 돌파구를 찾았다. 1096년 1차 십자군이 결성되자 제노바의 상선들은 십자군과 성직자들을 성지로 실어 날랐다. 그리고 곧이어 각종 군사 보급품을 안티오크 지역에 공급하면서 무역특권까지 요구했다.
당시 아말피와 베네치아, 제노아, 팔레르모 같은 이탈리아 도시국가들과 이집트, 비잔티움 제국은 노예와 철, 목재, 비단, 명반(明礬), 자주색 옷감과 염료 등의 물품을 두고 일종의 삼각무역을 시행 중이었는데 십자군 원정은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에 큰 힘이 됐다. 노예교역과 해적질, 성유물 약탈 등은 수익이 많이 남는 사업이었고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은 이런 알짜 사업을 놓치지 않았다.
11세기가 되면 베네치아가 신성로마제국 황제로부터 비잔티움 및 동지중해에서의 비잔티움 식민지들과 독점적으로 교역할 특권을 얻어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이에 따라 안티오크, 타르수스, 에페수스, 헤라클리온, 아드리아노폴리스, 살로니키, 아테네, 코르푸 등 레반트 지역에서 독점 교역권을 확보할 수 있었다.
물품 교역 외에도 이탈리아 상인은 십자군을 파견하는 왕과 제후를 고객으로 삼아 재력과 신용을 기반으로 돈을 빌려주면서 금융업을 발전시켰다. 그 결과, 은행과 신용대출, 이자 등을 다루는 금융산업이 발전했다. 14세기가 되면 제노바를 중심으로 복식 부기도 등장하게 된다.
이처럼 지중해 지역에서 교역이 활발해진 것은 유럽 전역의 상업적 움직임을 자극했다. 샹파뉴 정기시와 같은 프랑스 남부 지역의 상업활동이 두드러졌고, 멀리 북유럽 지역에서도 한자동맹이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정치적·군사적 측면에선 십자군은 "인종과 종교에 상관없이 그들의 칼이 닿는 곳에 있는 모든 사람을 쳐서 쓰러뜨렸다"(한스 에버하르트 마이어 전 독일 킬대학 교수)는 평을 들으면서 '유럽과 아랍 문명권 간의 지긋지긋한 피의 대립 관계의 시작'(스티븐 런시맨 전 영국 옥스퍼드대 교수)역할을 했다.
하지만 경제적 측면에선 보자면 당시 후진 지역이었던 유럽이 선진 이슬람 문명을 접하면서 얻은 이익이 컸다.
특히 중세 유럽에서 진행 중이던 금과 은 등 귀금속 부족을 해결하는 수단이 됐다. 성지에서의 귀중품 약탈뿐 아니라 1204년 제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약탈 등은 서유럽 지역의 금, 은 확보에 큰 역할을 했다. 지금도 프랑스와 독일, 이탈리아 지역의 주요 성당의 황금으로 장식된 예술작품 상당수는 십자군 전쟁 당시 획득한 금을 바탕으로 제작된 것들이다.
중세 유럽의 인구 증가는 대외 팽창과 외부 세계와의 전쟁으로 이어졌다. 인구는 늘어도 문제, 줄어도 문제다. 저출산·고령화가 급속하게 진행 중인 현대 한국 사회는 과연 어떤 사회변화 '압력'에 직면하게 될까. 후대의 역사는 오늘날 사회를 어떤 모습으로 그릴까.
김동욱 오피니언부장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