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년 역사의 거문고가 악기의 세계를 지배하다

입력 2024-02-26 18:21
수정 2024-02-27 00:19

거문고는 5세기 이전 고구려에서 만들어진 우리나라 전통 악기다. 밤나무와 오동나무로 만든 울림통 위에 명주실을 꼬아 만든 줄을 이어 맨 형태다. 이 줄을 술대라고 불리는 막대로 치고 튕겨 소리를 내는 현악기다.

1500년 넘게 전해 내려오는 거문고가 클라리넷과 화음을 쌓고 전자음악의 박자에 맞춰 노래한다. 전통 음악극 ‘무한수렴의 멀티버스’(사진)는 거문고가 시공간을 초월한 음악적 세계관을 여행하는 모습을 8개 곡으로 표현한다. 각각의 음악 ‘멀티버스’ 속에서 동서양의 악기가 함께 과거의 음악이 현대 음악 장르와 뒤섞인 무대를 선보인다.

막이 오른 무대 위에는 거문고 한 대가 떡하니 올려져 있다. 이내 아쟁과 판소리꾼이 합세해 첫 곡 ‘끌림’을 선보인다. 진도 ‘씻김굿’의 흘림 장단을 재해석한 무대가 펼쳐지며 우리 전통 음악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작품이 진행되면서 첼로, 트롬본, 피아노 등 서양의 악기가 합세한다. 거문고의 소리가 민속음악, 재즈, 클래식 등 서양 역사 속 다양한 음악 장르와 합을 맞춘다. 거문고가 서양의 악기들과 번갈아 연주하며 평화롭게 화답하다가 격정적인 연주로 무대를 장악하기도 한다.

7번 곡 ‘궤도 공명’에서는 거문고가 컴퓨터로 즉흥적으로 만들어지는 전자음악과 만나며 과거와 미래가 뒤섞인 음악 세계에 도달한다. 무대 위에 송출한 클라리넷 연주 영상과 거문고가 합주하는 퍼포먼스를 통해 미래 음악의 모습을 상상하기도 한다.

마지막 무대 ‘시나위’에서는 지금까지 무대에 오른 모든 악기가 총동원된다. 시간을 역행하듯 서양과 미래의 악기는 하나둘씩 무대 뒤로 사라진다. 마지막에는 거문고, 아쟁, 징, 피리, 장구만이 남아 우리 음악의 시초로 돌아간다.

음악이 끝나자 다시 거문고가 무대 위에 홀로 남겨진다. 무대가 적막 속에서 회전하기 시작한다. 거문고를 연주한 허윤정 감독이 나와 무대가 도는 반대 방향으로 걸으며 막이 내린다. 과거와 현재를 끊임없이 순환하다 다시 그 기원으로 돌아와 ‘무한수렴’의 길을 걷는 우리 전통 음악의 모습을 상징한다.

우리의 전통 악기로 음악 역사와 장르의 경계를 허무는 실험적인 작품이다. 전 세계의 연주자가 모여 동서양의 악기들로 만드는 음악이 낯설지만 신선한 충격을 준다. 거문고 연주와 음악감독을 맡은 허윤정 명인의 상상력이 앞으로의 작품들을 기대하게 한다.

구교범 기자 gugyobeo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