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화·삼베·짚풀…미술관서 치르는 '아버지 장례'

입력 2024-02-23 18:45
수정 2024-02-24 00:39

풀을 먹는 초식동물은 육식동물에게 먹히고, 육식동물이 쓰러져 죽은 자리에서는 새로운 싹이 움튼다. 삶과 죽음이 끝없이 맞물려 이어지는 이 같은 신비로운 순환은 언제나 예술가들을 매혹하는 주제다. ‘생명의 순환’을 다룬 예술 작품이 무수히 많은 이유다. 물방울을 그린 그림(김창열 화백)부터 춤과 노래가 어우러진 장대한 무대극(뮤지컬 ‘라이온 킹’)까지, 작가마다 풀어내는 장르와 방식도 제각각이다.

독일에서 활동하는 인도네시아계 브라질인 작가 댄 리(36·사진)가 생명의 순환을 표현하는 방식은 그중에서도 눈에 띄게 특이하다. 그는 곰팡이를 비롯한 미생물에 주목했다. 죽은 생물이 자연으로 돌아가 새로운 생명의 양분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게 미생물이니, 순환의 핵심도 미생물이라는 생각에서다. 그래서 그는 작품 속에서 흙과 꽃, 버섯 종자와 균류를 사용해 일종의 미생물 생태계를 만들어 생명의 순환을 표현한다.

서울 소격동 아트선재센터에서 지난 16일 개막한 개인전 ‘상실의 서른 여섯 달’에서도 그는 미생물을 사용한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2022년 미국 뉴욕 뉴뮤지엄에서 호평받은 개인전, 상파울루 비엔날레와 싱가포르 비엔날레 등에서 연 전시와 달리 이번에는 삼베와 국화 등 한국적인 재료를 주로 사용했다.

작가는 “아버지가 코로나19로 3년 전 세상을 떠났는데, 한국의 장례 문화 중 삼년상이라는 전통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며 “삼년상을 치르는 느낌으로 짚풀, 베 등 한국적 요소를 적극적으로 사용했고, 전시 제목도 이와 연관지어 정했다”고 설명했다.

작품 두 점은 본관 1층과 한옥 전시공간에 각각 배치됐다. 노란 직물들이 인상적인 본관 1층 작품에서는 쌀과 누룩이 담긴 옹기를 주목할 만하다. 막걸리라는 소재를 통해 ‘미생물로 생명의 순환을 표현한다’는 작품 콘셉트에 한국적인 색을 입힌 것이다. 한옥 전시공간에는 국화 다발과 새끼줄, 옹기 등을 사용한 또 다른 작품이 설치됐다. 국화 냄새가 진해 후각으로도 장례의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작가는 “이번 전시는 아버지에 대한 애도 기간을 끝마치는, 즉 삼년상을 끝내는 의미도 있다”고 설명했다.


그의 작품은 시간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작품 속 미생물들이 끊임없이 살아 움직이고 번식하기 때문이다. 전시 기간 중 국화는 서서히 시들어 가고, 노랗게 염색한 직물은 전시 기간 햇볕을 받아 탈색된다. 쌀과 누룩은 막걸리가 됐다가 상해갈 것이고, 어쩌면 흙 속에 숨어 있던 씨앗과 버섯 포자가 싹을 틔울지도 모른다.

그래서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이 순간에만 존재하는 작업”이라고 설명한다. 모양이나 냄새가 어떻게 변할지 작가 자신도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술품은 영원하다’는 통념과 반대되는 작업이지만, 그래서 역설적으로 작품은 삶과 생명의 변화와 덧없음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작품이 변화하는 만큼 여러 번 관람하면 좋은 전시다. 전시는 5월 12일까지.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