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어머니와 긴 작별을 한 몇 해 전 추운 겨울날 아침. 폐부를 찌르는 깊은 슬픔이라는 게 이런 것이구나를 실감하며 울다 지치기를 반복하던 중, 우연히 건네받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커피가 너무 맛있었다. 커피잔의 온기도, 아침을 깨우는 향긋한 커피의 아로마도 오롯이 느껴졌다.
도저히 견디기 어려울 것 같은 극한의 슬픔이 다가와도 여전히 커피는 맛있고, 내 하루는 시작되는구나 싶은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매무새를 가다듬고 손님을 맞이하고, 아이들을 챙기고, 내 슬픔을 굳이 알릴 필요 없는 사람들에게는 여느 때처럼 이메일을 작성하면서 어머니를 보내드렸다. 그날 그 한잔의 커피는 어떤 슬픔이 닥쳐도 세상은 똑같이 돌아가고, 나는 하루를 살 것이라는 작은 깨우침을 얻게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꽤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 수많은 전공과목의 수업 내용은 딱히 기억나는 것이 없지만, 당시 모든 신입생의 필수과목이던 교양영어 교재 제1장의 제목은 선명히 기억난다. ‘The Show Must Go On’. 미국의 작가이자 신문 발행인인 해리 골든이 쓴 이 수필의 제목은 사실 대중에게는 수필보다 영국의 전설적 록그룹인 퀸의 프레디 머큐리가 투병 중일 때 녹음한 곡의 제목으로 더 알려져 있다.
골든의 수필에는 죽을 만큼 괴로워하다가도 때가 되면 무대에 서서 공연해야 하는 희극 배우의 이야기가 나오고, 지난밤 자기 딸이 죽었음에도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출근해서 평상시처럼 바닥을 쓸고 닦고 있는 하인을 보면서 인도의 시인 타고르가 깊은 인상을 받았던 일화도 소개돼 있다. 이런 이야기들을 통해 골든은 모든 사람은 그들 가슴속에 슬픔을 지니고 무대 위로 오르지만 모든 사람을 위해 쇼는 계속돼야 하고, 단지 배우들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해 단 한 순간도 쇼를 감히 멈출 수 없다고 말한다.
비슷한 시기에 대학을 다닌 동문들에게 이 수필은 단순한 교양영어 교재만으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가장 푸르렀던 대학 시절의 수많은 기억 속으로 곧장 시간여행을 하게 해주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그러고 보면 당시 이 수필이 신입생들에게 남긴 강렬함은 나만의 경험은 아닌 것 같다.
이제 곧 3월이다. 누군가는 학교에서, 누군가는 직장에서 설렘을 가득 안고 새로운 출발을 하는 시기이고 또 누군가에게는 내년의 새로운 시작을 기약하며 다시금 시험이나 취업 준비를 하기 위해 마음을 다잡는 시기이기도 할 것이다. 저마다 출발선에 선 사람들이라면 누구에게나 마지막 결승선에 도달할 때까지 좋은 일도 행복한 일도 있을 것이고, 때로는 견디기 버겁거나 억울하고 슬픈 일도 있을 것이다. 그때가 되면 억지로 참거나 견디려 하는 대신 충분히 슬퍼하길. 그러나 슬퍼만 하거나 힘들어만 하지 말고 다시 자신의 쇼를 계속해 나가길 바란다. 조용필의 노래 제목처럼 그 또한 내 삶이고, 칸 영화제 출품작처럼 그리고 삶은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은 제목과 정반대로 불운하게 끝나버린 김첨지의 하루를 그리며 막을 내린다. 그러나 어쩌면 막이 내린 후의 김첨지는 아내가 먹지 못한 설렁탕을 대신 먹고 힘을 낸 후 아내를 향한 미안함과 그리움을 가슴에 담은 채, 다음날 다시 인력거를 몰기 위해 길을 나섰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인생에서 절대 중간에 퇴장할 수 없는 주인공들이고, 각자의 쇼는 계속돼야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