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규제가 많은 나라로 꼽힌다. 글로벌 100대 유니콘 기업(기업가치 10억달러 이상 비상장사) 중 상당수가 국내에선 사업을 할 수 없다. 의료와 금융, 공유경제 등 각 분야에 산적한 규제 때문이다. 한국경제연구원의 분석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으로 글로벌 100대 유니콘 기업 중 8곳은 한국에서 아예 사업이 불가능하다. 9곳은 사업을 할 수는 있지만 비즈니스 모델을 바꿔야 한다.
국내 창업자들도 규제를 사업의 걸림돌로 꼽는다. 신산업 규제가 국내 스타트업 성장의 걸림돌이라고 대답한 업계 대표의 비율이 지난해 10% 정도였다.
이전에는 규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치권과 관료 출신을 영입했다. 최근에는 규제 허들을 넘는 방법이 한층 더 다양해졌다. 같은 업종 기업들이 모여 협회를 만들어 협상력을 높이고, 최고경영자(CEO)가 직접 국회를 설득하기도 한다. 이런 방법으로 사업의 활로를 찾아낸 사례가 하나둘씩 늘고 있다. ○협회 만들어 대응
21일 업계에 따르면 최근 한목소리를 크게 내기 위해 뭉치는 스타트업이 늘었다. 지난해 하반기엔 공유형 개인 창고(셀프스토리지)를 제공하는 스타트업들이 한국스토리지협회를 설립했다. 회원사는 미니 창고 다락을 운영하는 세컨신드룸, 맞춤형 짐보관 서비스 오호의 운영사 메이크스페이스 등이다. 이들 업체가 제공하는 보관 편의 시설은 건축법상 관련 규정이 없어 논란이 됐다. 세컨신드룸은 협회의 도움으로 최근 정부의 규제샌드박스 제도를 통해 도심에서 임시 사업 허가를 받았다. 한국스토리지협회는 정부를 계속 설득해 관련 규제를 개선할 계획이다.
생성형 인공지능(AI) 스타트업도 하나로 뭉쳤다. 국내 유망 AI 스타트업들은 지난해 9월 생성AI스타트업협회 출범식을 열었다. 뤼튼테크놀로지스, 라이너, 스캐터랩, 프렌들리AI 등이 회원사다. 초대 협회장은 이세영 뤼튼테크놀로지스 대표가 맡았다. 이 회장은 “국내 생성 AI 생태계를 발전시키고 생성 AI 스타트업의 글로벌 진출을 위해 협력할 네트워크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협회 활동을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AI 관련 규제에 대해 업계 의견을 정부에 전달하는 것도 생성AI스타트업협회의 주요 활동이다.
원격의료 스타트업이 모인 원격의료산업협의회(원산협)도 열심히 활동하는 스타트업 협회로 꼽힌다. 원산협은 지난 8일 ‘비대면 진료 시범사업 확대로 인한 효과 및 국민 체감사례’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정부의 비대면 진료 확대 정책이 시행된 지난해 12월 15일부터 올해 2월 2일까지 50일간 주요 4개사에 접수된 비대면 진료 요청 건수가 총 17만7713건으로 집계됐다고 밝혔다. 비대면 진료 확대 정책 시행 전 50일간 접수된 2만1293건보다 7.3배 이상 증가한 수치다. 원산협은 원격의료 전면 허용이라는 최종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원격의료 필요성을 계속 알리고 있다.
리걸테크 스타트업들이 꾸린 리걸테크산업협의회 관계자들은 지난해 12월 법제처장을 만났다. 그 자리에서 AI로 법령 데이터를 제대로 분석하기 위해 판결문 공개를 확대해달라고 요청했다. 다른 정부 부처와 정부위원회에서 다루는 다양한 법령과 법제 정보를 법제처가 한곳에서 제공하는 방안도 요구했다. ○직접 뛰어다니며 규제 개선기업 경영 환경이 불투명한 스타트업 창업자들은 정부와 국회를 직접 설득한다. 모두 성공하진 않지만, 규제 우회라는 목적을 달성한 사례도 적지 않다. 최근 주목받은 토큰증권(STO) 사업이 그런 경우다. STO는 실물 자산을 블록체인 기반의 토큰 형태로 발행해 일명 ‘조각 투자’를 가능하게 하는 금융 서비스다. 2018년 설립된 프롭테크(부동산+기술) 스타트업 루센트블록의 허세영 대표도 커피 한 잔 가격으로 부동산의 일부 지분을 거래할 수 있는 투자 플랫폼 개발에 나섰다.
하지만 현행법상 부동산 신탁을 통한 수익증권 발행이 불가능해 사업 추진이 쉽지 않았다. 허 대표는 “한 달 이상 오전 7시에 금융위원회를 찾아가 담당 공무원을 온종일 설득했다”고 말했다. 이런 노력 끝에 루센트블록은 규제샌드박드를 통해 2022년 부동산 조각 투자 플랫폼 ‘소유’를 출시할 수 있었다. 정부는 지난해 STO 발행과 유통을 전면 허용하기로 하고 관련 가이드라인을 내놨다.
온라인투자연계금융업(P2P)도 비슷한 사례다. P2P는 돈이 필요한 대출 희망자와 돈을 빌려줄 수 있는 투자자를 이어주는 사업이다. 2015년 핀테크 스타트업 렌딧을 설립한 김성준 대표는 창업 때부터 P2P를 규제하는 법안이 필요하다고 정부와 국회를 설득했다. 투자자와 소비자를 보호하기 위한 법적 근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2019년 P2P 금융업을 규정하는 법이 세계 최초로 국회를 통과했다. 렌딧은 온라인투자연계금융업 1호 업체로 정부에 등록했다. ○규제를 역이용규제를 사업 기회로 활용하는 역발상 스타트업도 늘고 있다. 리걸테크(법률+기술) 스타트업 엘박스는 변호사협회와 로앤컴퍼니(로톡)가 갈등을 빚자 논란이 없을 분야를 골라 리걸테크 사업을 확대했다. 이 회사는 법원 판결문을 온라인으로 확인할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 중이다. AI로 판결문을 분석해 판사와 최근 법원의 판결 성향도 알려준다. 현재 법원은 경기 고양시 법원도서관 등에서만 판결문 열람을 할 수 있도록 제한하고 있다. 엘박스는 회원 변호사를 통해 공유받은 판결문으로 250만 건이 넘는 관련 데이터를 확보한 상태다.
블록체인 스타트업들은 가상자산 투자가 어려운 법인을 대신해 관련 업무를 대행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법인의 가상자산 직접 투자가 불가능하다. 암호화폐 투자사인 하이퍼리즘은 국내외 150여 개의 법인·적격투자자를 대상으로 수천억원 규모의 암호화폐 투자신탁을 운용하고 있다. 이미 2021년 금융정보분석원에 가상자산 사업자 신고를 완료했다. 블록체인 스타트업 해치랩스는 법인 대상의 가상자산 지갑 서비스 헤네시스를 운영하고 있다. 암호화폐와 대체불가능토큰(NFT)을 가진 업체는 헤네시스를 활용해 인터넷뱅킹을 하듯이 법인 계좌에서 가상자산을 관리할 수 있다.
김주완 기자 kjw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