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스타트업 에이전시에서 다시 시작해 경력단절을 극복하던 5년 전, 당시 한 스타트업 초기 투자사가 나의 클라이언트였다. 클라이언트의 사무실이 있던 건물 5층엔 아주 흥미로운 이름의 회사가 있었다. (이하 F사라고 칭하겠다) 종종 미디어 모니터링을 통해 F사에 대한 이야기를 접했지만, 정확히 어떤 철학을 가지고 어떤 일을 하는 곳인진 잘 몰랐다.
궁금한 마음에 포털사이트에 몇 번 검색해 봤지만 아주 파편적인 정보만 가득했다. 이 회사에 대한 첫 인상은 '이름은 아주 트랜디한데 정확히 어떤 곳이고 뭘 지향하는진 잘 안 모르겠다'였다.
아주 무더운 어느 여름날, 한 투자사의 커뮤니케이션 팀장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녀는 10여 년 전 대학시절 여름 인턴 프로그램을 했던 스타트업에서 처음 만났었다. 스타트업 홍보를 맡고 있지만 현재 트랜드나 투자현황과 같은 분위기를 좀 더 알고 싶어 연락해 두었던 참이었다.
“혹시 이직 관심 있어요? 안그래도 F사에서 PR담당자를 채용한다고 좋은 사람 추천해달라는데 한 번 만나봐요!”
궁금한 건 어떻게든 해결해야 하는 내 성격에, 궁금했던 그 회사에서 사람을 찾는다니. 당시 이직보단 호기심이 앞섰기에 냉큼 제안을 수락했다. 바로 F사의 파트너와 미팅 일자가 잡혔고 2주 후에 건물 5층으로 찾아갔다. 회사에 대한 첫 인상은 ‘와, 생각한 것보다 더 흥미로운데?’ 였다.
육중한 책장을 열고 들어가면 나오는 회의실, 브루클린 어딘가에 있을 것만 같은 인테리어의 사무실, 자유롭게 근무하는 스무명 남짓의 구성원들이 눈에 들어왔다. 회사에 가자마자 F사의 파트너는 ‘대표님도 같이 뵈어도 괜찮죠?’ 라고 물었다. 갑작스런 대표와의 미팅에 내심 놀랐지만 이미 만난 사람 앞에서 ‘아니요, 저 준비 다시하고 만나고 싶어요' 할 수 없기에 그러겠다고 했다.
그렇게 만난 F사 대표와는 2시간 좀 안 되게 이야기를 나눴다. 면접보다는 서로의 궁금증을 푸는 자리였다. 대표는 PR이 왜 중요한지, 우리 회사라면 뭘 하면 좋을지, 또 내가 어떤 걸 할 수 있을지를 진심으로 궁금해하며 질문했다. 나 역시 ‘왜 이 회사는 이런걸 하지 않는지'와 ‘왜 채용을 하려는지'를 물었다. 그리고 ‘왜 이 회사는 가지고 있는 브랜드 잠재력만큼 보여지지 않는지, 이런 것을 하면 정말 재밌을텐데' 하면서 재미있는 제안도 몇 가지 했다.
커피챗 말미에 대표는 ‘너무 즐거운 대화였고, 우리 회사 리드와 파트너들과의 만남을 위해 한 번 더 미팅할 수 있을지'를 물어왔다. 그렇게 면접인듯 아닌듯한 커피챗을 마치고 바로 다음 주 F사의 구성원들과 한 번 더 미팅을 했다.
두 번째 구성원들과의 미팅후 대표는 합류제안과 동시에 현재 받는 연봉이 얼마인지 물었다. 연이어 제시한 금액은 전 회사의 연봉에서 아주 근소한 상승폭이었다. 사실상 수평이동이었지만, 미련없이 수락했다.
솔직히 말하면 엄청난 큰 뜻이 있어서라기보단, '여기서 일하면 재밌겠다’는 생각이 강했다. 물론 처음엔 입사도 하기 전에 바로 테스크가 주어져서 ‘입사도 전에 실력을 증명해야 하나’ 라는 망설임도 살짝 있었다. 그래서일까? F사에의 두 번의 연봉협상 모두 회사에서 처음 떠올렸던 금액을 상회할 정도로 나의 성과에 대한 보상을 해주었다.
그때마다 ‘내가 무리해서 연봉을 제시했다면 그 성과 증명을 위해 더 힘겹게 발버둥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결국 합리적인 회사라면, 그에 대한 성과보상은 따라오게 되어있다.
직장인들 사이에서 ‘현 연봉의 20% 상승은 제시할 것' 이란 불문율이 있다. 하지만 이 수치는 정해진 법도 아니고, 또 왜 20% 인지에 대한 근거도 부족하다. 물론 ‘이직하면 새로운 환경에서 받는 스트레스와 리스크 테이킹이 있기 때문에 올리는 게 좋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나는 ‘아직 라포도 형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나의 성과는 이력서와 경력기술서 단 2장으로만 판단해야 하는 대표의 입장에서 생각해본다면?’이라고 반문한다.
스트레스와 리스크 테이킹에 대한 계산은 ‘내가 을이다’라는 마음가짐에서 수반된다. 그런데 왜, 항상 구직자는 을의 입장으로 리스크를 계산해야할까. 나의 실력과 성과에 대한 자신이 있다면, 프레임을 뒤집어 생각하는 것도 필요하다.
또한 협상에 있어 회사의 사정도 고려해야 한다. 회사는 대체로 연봉협상에 있어서 가능한 낮은 금액을 제시할 것이다. 고정비에 해당되는 인건비는 가능한 적게 나가야 경제적이고, 또는 이미 회사 차원에서 정해둔 직무 연봉 밴드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첫 이직자라면 내 연봉이 해당 직무 밴드의 기준점이 될 수도 있다.
전자의 경우 내가 아주 대단한 실력자가 아니고서야 판세를 뒤집긴 어렵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는 다르다. 실제로 스타트업 업계에서는 ‘어느 업계에서 온 누구는 얼마를 받고 이동했다더라’는 얘기가 종종 들려온다. 하지만 언젠가 그 금액에 합당한 실력이 드러나게 된다. ‘그 사람은 그 연봉을 받을 만 해’보다는 ‘와 그 직무가 그 연봉이라고? 말도 안돼’ 라는 소문이 대부분이지만.
그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당장 눈 앞의 이익보다는 장기적으로 내가 이 업계와 직무를 주도적으로 성장시켰다면 더 좋았을텐데' 라는 안타까운 마음이 앞선다.
내가 높은 몸값으로 이 업계에서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시장의 평가는 생각보다 냉정하고 객관적이다. 그래서 무리하게 나의 연봉을 높이려하기보단, 정말 내가 자신있다면 내 실력을 먼저 보여주고 역제시를 하는 것도 또 하나의 협상수단이 될 수 있다.
그러니 수평이동도 먼 미래의 나를 생각하면 꽤나 합리적인 선택이라 생각한다. 물론 회사의 성장이 나의 몫으로 모두 귀결되진 않지만 함께 성장한다는 ‘낭만'에 한 번쯤 승부수를 던져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F사를 떠나 지금의 회사에 자리잡은지도 벌써 2년이 훌쩍 넘었다. F사에 있던 2년동안 해보고 싶은 것, 해야하는 것 원없이 했다. 다큐멘터리도 만들고, 기자도 누구보다 많이 만나고, 기사도 누구보다 많이(에이전시에 있을 때보다 더) 열심히 피칭했다. 근무기간동안 스타트업 투자 유치 정보검색 사이트에서 관심도 1위도 유지를 유지했고, 투자 받고 싶은 투자사 순위권으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모든 과정이 너무나 즐거웠고 또 그 때의 결과물들을 보고 여전히 많은 분들이 나의 에너지를 좋은 방향으로 기억해주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마음껏, 회사이름처럼 ‘즐겁게 놀면서' 일하게 해준 F사에게도 여전히 감사한 마음이 가득하다.
짧지 않은 인생, 길게 볼 커리어에 있어 연봉협상은 ‘It’s not a big deal’ 이다. 더 큰 Big deal은 내 커리어의 방향과 주도권을 찾는 것이다.
강홍민 기자 kh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