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과정이 경영상 필요에 따른 합리적 결정이었는지, 아니면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경영권을 물려받기 위해 벌인 조직적인 위법 행위였는지를 놓고 3년5개월간 법정 다툼이 이어졌다. 1심 재판부는 이 회장 측 손을 들어줬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5-2부(부장판사 박정제 지귀연 박정길)는 5일 부당 합병, 회계 부정 등의 혐의로 기소된 이 회장과 최지성 전 삼성그룹 미래전략실장, 장충기 전 미래전략실 차장 등 14명 모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기소 전제부터 뒤집혀핵심 쟁점이 된 이 회장의 혐의는 자본시장법 위반, 업무상 배임, 외부감사법 위반 등 세 가지다. 검찰은 ‘공짜 경영권 승계’라며 이 회장에게 징역 5년, 벌금 5억원을 구형했지만 1심 재판부는 ‘증거가 부족하다’ ‘달리 인정할 증거가 없다’며 검찰이 제시한 19개 공소사실을 모두 배척했다.
이 회장 등은 2015년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을 합병하는 과정에서 최소 비용으로 경영권을 승계하고 지배력을 강화할 목적으로 미래전략실이 추진한 각종 부정 거래와 시세조종, 회계 부정 등에 관여한 혐의를 받았다. 검찰은 이 회장 등이 합병된 삼성물산 지분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제일모직 주가는 올리고 삼성물산 주가는 낮추는 과정에서 불법행위를 저질렀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자본시장법 위반 혐의의 전제가 된 ‘경영권 승계 목적’부터 뒤집었다. 재판부는 “이 회장의 경영권 강화 및 삼성그룹 승계만이 합병의 유일한 목적이라고 단정할 수 없고 삼성물산의 사업적 목적 또한 합병의 목적으로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또 2012년 미래전략실이 작성한 ‘프로젝트-G(거버넌스)’ 문건에 대해 “이건희 사망 시 막대한 상속세 납부 등에 따른 지분율 변화에 대응하는 방안을 종합적으로 검토한 보고서일 뿐”이라며 “검사의 주장처럼 약탈적 불법 합병계획을 담은 승계 계획안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시세조종 증명 안 돼검찰은 이 회장 등이 △거짓 정보 유포 △중요 정보 은폐 △허위 호재 공표 △주요 주주 매수 △국민연금 의결권 확보를 위한 불법 로비 △계열사인 삼성증권 PB조직 동원 △자사주 집중 매입을 통한 시세조종 등으로 자본시장법을 위반했다고 봤다.
재판부는 “두 회사 합병을 통한 그룹 지배력 강화 및 경영권 안정화는 오히려 삼성물산과 그 주주들에게 이익이 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허위 호재 공표, 자사주 매입을 통한 시세조종 등 자본시장법 위반 혐의와 관련해 검찰이 제시한 개별 공소 사실에 대해서도 “증거가 부족하다”거나 “받아들이기 어렵다”며 혐의를 인정하지 않았다.
재판부는 이 회장 등에게 적용된 업무상 배임 혐의도 배척했다. 이 사건 합병으로 인해 삼성물산은 기업가치를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고 이에 투자자들이 재산상 손해를 봤다는 게 검찰 측 공소사실이다. 하지만 재판부는 “검사가 주장하는 손해는 ‘추상적 가능성’에 불과하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제일모직 자회사인 삼성바이오로직스와 관련해 거짓공시 및 분식회계를 한 혐의에 대해 외부감사법 위반죄를 적용한 검찰의 공소사실도 이를 인정할 만한 근거가 부족하다고 봤다. 검찰 항소할 듯검찰은 작년 11월 열린 결심공판에서 “이 회장은 경영권 불법 승계 혐의의 최종 책임자이자 수혜자”라며 이 회장에게 징역 5년, 벌금 5억원을 구형했다. 이 회장 측은 “법과 절차를 준수했고, 회사와 주주 모두에 이익이 된다고 판단해 합병을 추진했다”며 혐의를 전면 부인했다.
이날 1심 재판부가 “이 사건 공소사실 모두 범죄의 증명이 없다”며 검찰이 제출한 모든 공소사실을 물리치면서 애초부터 무리한 수사·기소가 아니었냐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 20년에 걸친 삼성 승계 작업의 위법성을 정조준했던 검찰은 자존심을 구기게 됐다.
서울중앙지검은 선고 이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과 관련한 이 회장 등 사건의 1심 판결에 대해 판결의 사실인정과 법리판단을 면밀하게 검토·분석해 항소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민경진/허란 기자 m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