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에서 가장 논쟁적 법안인 ‘공급망 실사(實査)법’이 지난해 12월 EU 입법기관 간 합의에 도달했다. 이제 최종 승인만 앞뒀다. 2020년 4월 EU 집행위원회가 계획을 발표한 뒤 4년간이나 숙의했을 정도로 쟁점이 많고 산업 전반에 미치는 영향도 큰 법안이다.
공급망 실사법의 정식 명칭은 ‘기업의 지속 가능 실사 지침(Corporate Sustainablity Due Diligence Directive)’이다. 이에 따르면 일정 규모 이상의 기업은 자사의 생산 공정 및 제품뿐 아니라 공급망 전체에 대해 실사 의무를 진다. 인권 및 환경에 대한 부정적 영향도 최소화해야 한다.
여기서 공급망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서플라이 체인’보다 넓은 개념이다. 원자재, 생산, 유통, 운송, 저장 및 폐기 등 소비자에게 판매되기 전까지의 모든 과정을 포괄한다. 자동차를 예로 들면 완성차 제조기업은 3만 개에 달하는 부품의 공급 업체는 물론 유통 및 운송 과정에 포함된 모든 협력 업체가 공급망 실사 의무를 지게 되는 식이다. 단 현실적으로 수많은 협력 업체의 위험을 원청기업이 모두 떠안을 수는 없기에 상호 간 보증계약을 통해 책임을 적절히 분담할 수 있도록 숨통을 터줬다.
이런 조치는 공급망 실사법 적용 대상인 원청 대기업의 부담은 다소 줄어드는 반면 하청 기업들이 실사 책임을 분담해야 한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유럽에 수출하지 않는 내수기업이라도 최종 제품이 유럽에 수출되고 해당 기업이 이 법의 적용 대상이면 역시 일정 부분 실사 의무를 지게 된다. 그러나 유럽에 수출하는 기업이어도 제품이 대기업 공급망에 포함되지 않는다면 이 법의 적용 대상에선 제외된다.
지난해 공급망 실사법의 ‘선발대’ 격인 ‘산림전용방지규정’이 시행됐다. 그 덕분에 공급망 실사법이 시행될 때의 시장 충격을 어느 정도 가늠해볼 수 있게 됐다. 산림전용방지규정에 따르면 팜오일·소고기·고무·목재 등을 EU로 수출할 경우 해당 산림에 대한 공급망 실사보고서를 제출해야 한다. 카르푸 등 유럽 유통기업은 실사 의무가 시행되기 전인 2021년 이미 열대우림 훼손 우려가 있는 브라질로부터의 육류 수입을 중단한 바 있다.
팜오일과 고무 수입 규제 움직임 때문에 EU와 인도네시아 간 통상마찰이 발생했다. 그 영향으로 인도네시아산 원료를 활용하는 국내 바이오 연료 및 타이어업계도 공급망 다변화라는 과제를 떠안게 됐다. 이 법안은 특히 섬유, 임업, 농업, 광업 등 노동 환경이 취약하거나 환경오염이 우려되는 산업을 고위험 분야로 지정해 더욱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고 있다.
유럽은 개발도상국에 관세 혜택을 주는 일반특혜관세(GSP) 제도를 운영하고 있어 해외에 진출한 국내 봉제업계의 주요 수출대상국이 돼 왔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유럽의 입법 동향 정보가 부족해 공급망 실사에 대한 대비는 매우 부족하다.
공급망 실사법은 통과 즉시 효력이 생기는 ‘규정’이 아니라 회원국별로 이행법안을 마련해야 하는 ‘지침’이다. 개별 이행 입법을 위해 회원국에 2년의 세월이 주어졌다. 하지만 EU의 주축인 프랑스와 독일은 법제화를 완료했고 이탈리아 등 다른 회원국도 준비를 서두르고 있다. 더욱이 기업 대응이 법보다 빠르게 진행돼 신뢰할 만한 공급처를 중심으로 공급망이 재편될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새로운 규제의 도입은 유럽에 진출한 국내 기업에 추가적인 비용과 행정 부담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잘만 준비한다면 게임 규칙이 바뀌고 공급망이 재편되는 과정에서 견고한 유럽 시장의 새로운 가치사슬에 진입할 호기를 맞을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