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0여 년간 유럽연합(EU)을 이끌던 독일의 영향력이 급격히 축소했다는 지적이 나왔다. 독일 경제가 둔화하면서 EU 내에서도 권위를 잃었다는 분석이다.
21일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EU 회원국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기점으로 독일에 대해 지지를 철회하기 시작했다. 독일은 탈(脫)원전 정책을 확대하면서 러시아와 함께 천연가스 공급처를 늘려왔다. 이에 따라 독일은 러시아와의 마찰을 고려해 국방비를 매년 국내총생산(GDP) 대비 1%대로 책정했다. 국방 예산을 절약하고 복지 예산에 힘을 주려는 취지였다. EU의 방위비를 증액하는 것도 반대해왔다.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폴란드와 발트해 3국(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의 반발이 거셌다. EU 회원국에 군수품을 수출하려는 프랑스의 불만도 컸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뒤 EU는 지난해 3억유로(약 4370억원)의 예산을 따로 편성해 무기를 공동구매하기로 결정했다. 독일의 권위는 실추됐고, 동유럽 회원국의 영향력이 커지기 시작했다.
전기차 보조금 정책도 독일의 실책 중 하나로 꼽힌다. 프랑스는 일찍이 보조금을 확대해 유럽만의 보호무역주의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반면 독일은 다른 경제권에 악영향을 미칠 수 없다며 반대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이를 두고 “유럽은 너무 순진무구하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미국이 2022년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을 시작으로 자국에서 생산된 전기차에 대한 보조금을 확대하자 EU도 뒤늦게 녹색산업의 보조금 요건을 완화하기 시작했다. 프랑스는 자체적으로 프랑스판 IRA를 도입했다. 지난 14일 비유럽산 전기차를 보조금 지급 대상에서 대거 제외했다. 일각에서는 메르세데스, BMW, 아우디 등 독일 완성차업계의 전기차 전환이 지연된 탓에 보조금 확대가 늦춰졌다는 비판이 나왔다. EU 관계자는 이코노미스트에 “독일은 항상 EU 여론보다 느리게 움직인다”고 지적했다.
독일의 영향력이 축소되면서 오는 6월 유럽의회 선거에서 유럽의 권력 구도가 재편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현재 유럽의회 750석 중 유럽인민당그룹(EPP)이 175석으로 가장 많은 의석을 차지하고 있다. EPP는 독일 기독교민주연합(23석)이 주도하고 있다. 유럽 정치매체 폴리티코EU 설문조사에 따르면 EPP 의석수는 선거 후 172석으로 줄어들 것으로 집계됐다. 유럽의회 선거 결과는 우크라이나 지원, 기후변화 대응, 이민자 수용 등에 대한 EU의 정책 방향에 영향을 줄 전망이다.
오현우 기자 oh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