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젓대의 방언)는 박종기요, 박종기가 절대로다. (···) 형님 소리 내가 알고 내 소리를 형님이 아오 /종자기 가고 나서 백아 줄을 끊었으니 /나와 형님 떨어지면 /서로 간에 소릿길을 누가 있어 짚어주며 /어디에 비춰보리? ”
지난 17일 서울 서초동 국립국악원 풍류사랑방에서 개막한 음악극 ‘적로’의 도입부. 1941년 초가을, 오랜 경성(서울)살이를 접고 고향(진도)으로 돌아가려는 박종기(이상화 분)를 붙잡기 위해 부르는 김계선(정윤형)의 창(唱)이 애달프고 간절하다. 김계선은 ‘지음(知音)’ 종자기가 세상을 뜨자 거문고 줄을 끊고 다시 연주하지 않았다는 백아의 고사를 인용하며 자신의 애타는 마음을 표현한다.
배삼식이 극작, 최우정이 작곡·음악감독, 정영두가 연출·안무를 맡은 이 작품의 두 주인공인 박종기(1879~1941)와 김계선(1891~1943)은 일제강점기에 이름을 떨친 젓대(대금) 명인이다.
두 명인이 활약한 분야는 달랐다. 먼저 이름을 떨친 것은 김계선이다. 경성 태생인 그는 일제강점기 국립음악기관 이왕직아악부(국립국악원 전신) 소속으로 정악(正樂) 대금 명인이었다. 합주 중심의 정악에서 대금을 독주 악기로 부각한 주인공이다. “김계선 전에 김계선 없고, 김계선 후에 김계선 없다”는 말이 전해 내려올 만큼 전국적인 명성을 떨쳤다.
박종기는 조선 순조 이후 발달한 서민적인 토속음악인 민속악의 대금산조 예인이다. 판소리 음악에 조예가 깊어 산조에 판소리 기법을 도입했다. 진도아리랑의 선율을 정리하고 연주화시킨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두 명인이 함께한 공식 기록은 두 사람이 같이 연주한 음반 목록 정도만 남아 있다. 배 작가는 이 목록과 김계선이 민속악 예술가들과도 교류한 기록, 실제 행적 등을 바탕으로 상상력을 발휘해 두 인물을 ‘지음지기(知音知己)’로 극화했다.
두 인물이 깊은 관계와 사연을 맺게 하는 가상 인물로 춤추는 기생 산월(하윤주)이 등장한다. 세 사람이 처음 만난 계기는 조선총독부에 고위 관리가 부임한 것을 기념해 열린 파티장이다.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게 된 박종기와 김계선은 어떤 성격의 자리인지 안중도 없이 경쟁적으로 연주를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소리 배틀’을 벌인다. 이 장면에서 두 명인을 각각 상징하는 두 대금연주자가 연주석에서 연주 대결을 하는 동시에 무대의 두 배우는 몸 씨름을 하는 연출이 재치 있다.
이 배틀 이후 동기(童妓)가 등장해 멋진 춤을 선보이는 데 바로 산월이다. 두 명인은 산월에게 반하고, 산월은 젓대 소리에 반한다. 이후 산월은 기회가 될 때마다 두 사람을 불러 젓대 연주에 맞춰 춤을 추는 등 교류를 지속한다.
이후 두 명인이 산월에게 젓대를 처음 불게 된 과정과 자신의 인생·예술관 등을 각각 소리(唱)로 들려주는데 극적으로나 음악적으로 이 음악극의 백미라고 할 만하다. 작가의 상상력뿐 아니라 두 명인의 실제 삶이 배어 있어 감동이 배가된다. 이 음악극의 제목인 ‘적로’는 ‘방울져 떨어지는 이슬(滴露)’, ‘악기를 통해 흘러나온 입김에 의한 물방울(笛露)’, ‘예술가의 혼이 서린 악기 끝의 핏방울(赤露)’이라는 세 가지 뜻을 모두 담고 있다. 소리꾼 정윤형과 이상화가 온몸으로 절절하게 토해내는 두 명인의 삶은 세 번째 의미인 ‘핏방울(赤露)’을 떠오르게 한다.
다채로운 음악적 기법도 주목할 만하다. 두 젓대 명인은 소리꾼을 기용한 반면, 산월 역의 하윤주는 노래로서 정악(正樂)에 해당하는 정가(正歌)를 부르는 가객 출신 배우다. 산월은 한문으로 된 가사를 정가로 부르다가 한글로 풀어 다시 노래한다. 반주는 대금과 아쟁, 타악기, 클라리넷, 피아노 등 국악기와 양악기가 혼재돼 있다.
두 명인을 연기하는 소리꾼들은 국악기 반주에 맞춰 소리를 하지만, 국악·양악 혼합 반주에 맞춰 음악극 스타일의 넘버(삽입곡)를 부르기도 한다. 판소리 중심의 창극과는 차별화된 음악극을 꾀하는 새로운 시도는 평가할 만하지만, 극적 내용과 얼마나 어울렸는지, 다채로운 창법이 혼란을 초래한 측면은 없었는지는 꼼꼼히 따져봐야 하겠다.
송태형 문화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