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바뀌며 이제 완연한(?) 40대가 되었다. 늘어가는 주름과 흰머리는 슬프지만 20대보다는 30대가 좋았고 30대보다 40대의 인생이 훨씬 충만해졌다. 인생의 정점이라는 40대에, 그리고 엄마이자 아내로, 딸이자 며느리로, 또 경단녀를 거쳐 워킹맘으로 살며 느낀 것들을 공유하고자 한다.
결이 맞는 사람과 가까이하자
과거의 나는 타인의 평가에 지나치게 연연했다. 모든 사람이 나를 좋아해 주길 바랐고 좋은 평가를 해주길 바랐다. 마치 인기투표 하듯이 많은 친구들이 옆에 있고 나를 찾아주는 것이 존재가치를 확인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다 보니 주변에 사람은 많았지만 타인에게 휘둘리거나 끌려 다닌 적도 많았고, 거절하지 못해 곤란하다고 느끼는 상황도 많았다. 맞지 않는 사람과의 불편한 자리를 감수하며 있거나 무례한 사람에게도 대응을 하지 못해 끙끙 앓기도 했다.
점차 나이가 들고 가정이 생기며 유한한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쓸 수밖에 없어지며 인간관계는 정리가 되기 시작했다. 인생에서 중요한 가치-나의 가족과 가정, 그리고 나와 잘 맞는 그 자체로 참 괜찮은 사람들에 에너지를 쓰고 나머지 관계는 거리를 두면서 주변에는 좋은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지금도 나는 거절이 어렵다. 하지만 심호흡을 하고 필요한 거절을 정중하게 잘 하려고 한다. 타인이 잘되는 것을 깎아내림으로 자기의 존재감을 확인하고자 하거나 남의 약점을 본인의 성공의 밑거름으로 삼는 사람을 멀리한다.
그 안에서 깨달은 건 ‘내 인생을 타인의 기준에 맞추거나 비교하지 말자’다. 중요한 사람과 타인을 배려할 수 있는 괜찮은 사람에게 에너지를 쏟기에도 부족한 인생이다. 행복의 주체는 나이지 남이 아니다. 내가 좋은 사람이면 좋은 사람을 알아보는 눈이 생기고, 주변에는 좋은 사람이 생기니 떠난 인연에 아쉬워할 필요도 없다. 내가 오롯이 서면 굳이 타인에게 사랑받으려 애쓰지 않아도 나를 찾는 사람들은 생기기 마련이다.
친절과 호의는 돈이 들지 않는다
타인의 평가에 연연할 필요가 없다는 것과 상반되어 보이지만 굳이 적을 만들 필요는 없고 내가 해줄 수 있는 호의라면 베풀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인생은 혼자사는 것이 아니고 지금 만난 사람을 내가 어디서 어떻게 만나게 될지는 알 수 없다. 무리가 아닌 선에서 친절하고 사소한 호의를 자주 행하는 사람은 어디서든 평이 좋고 이렇게 만들어진 평판들이 모여 적어도 내 앞길을 가로막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예전의 나는 무례한 사람, 이유 없이(그의 내면에는 무언가 이유가 있었을지는 모르지만) 적대적인 사람에게도 친절하려 애썼다면 현재는 이런 사람들은 멀리할 뿐더러 굳이 선의를 보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본인의 감정에 휘둘려 타인에게 무례한 사람을 견디는 것은 내 자신에 대한 무례함이다.
타인에게 친절하고 배려하되 그렇지 못한 사람은 멀리하자. 굳이 에너지를 쏟거나 호의를 베풀 필요는 없다.
소유보다는 경험에 투자하자
예나 지금이나 나는 쇼핑을 좋아한다. 그리고 명품도 좋아한다. 내가 명품을 좋아한 이유는 시기마다 다른데, 지금으로부터 약 20여년 전 대학생 시절과 20대에는 명품을 구입하는 사람이 지금보다 훨씬 희소성이 있어 내가 패션에 대해 ‘뭘 좀 아는’사람이라는 느낌을 주고 싶었다.
결혼 이후 전업주부로 잠시 지방에 머무른 적이 있었다. 그때의 명품은 ‘내가 이렇게 잘산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해외여행을 갈 때 목적이 여행인지 쇼핑인지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팬데믹을 거치며 내가 느끼기에도 지나치게 비싸진 가격과 이제는 희소성마저 사라진 지금은 예전만큼 사지도 않을 뿐더러 흥미도 잃었다. 최근에 방문했던 뉴욕에서는 사치품 쇼핑은 1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내가 간 어떤 여행보다 인상깊었고 행복했다.
아이와 함께 간 여행에서 인생에서의 새로운 경험을 나도 아이도 했다. 쇼핑을 하기 좋은 곳보다아이와의 ‘좋은 경험’을 할 수 있는 곳이 우리의 여행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교육과 경험, 좋은 환경과 시야를 넓히고 배우는 것에 (각자의 경제상황에 맞춘다는 전제하에) 그리고 고마운 사람, 소중한 사람과 함께 하는 시간에 돈을 쓰는 것이 명품을 사는 것보다 훨씬 값지고 진정 ‘있어 보인다’는 것을 40이 돼서야 깨달았다.
아이와 나를 분리하자
아이는 내가 아니다. 아이가 준비물을 챙겨가지 못한 거나 약간이라도 시간약속을 어기게 되는 것, 학교에서 챙겨야 할 것들을 야무지게 하지 못하는 아이의 모습에 나는 극도로 예민하게 반응하곤 했었다.
하지만 당연히 미숙해야 할 만 6~7세인 아이에게 화가나는 것의 저변에는 사실은 나에 대한 평가가 무너지는 게 싫어서 라는 것, 아이의 미숙함이 나에 대한 평가로 동일시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이가 잘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이끌어줘야’하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다. 아이의 ‘미숙함’이 나의 평판은 아니며 아이에 대한 평가와 나를 동일시하는 것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아이도 나도 불행해진다는 걸 알게 됐다.
외모에 신경쓰자
예쁘고 잘생길 필요는 없다. 그러나 사람의 분위기를 결정하는 것은 외모를 비롯한 그 사람이 보여주는 모든 것의 총합이다. 실제로 언어메시지보다 비언어적 메시지가 훨씬 강력하다는 연구결과가 많듯이 말이다.
대다수의 전업주부 엄마들은 아이를 키우면서 본인의 외모에 투자하는 것에 죄책감을 느낀다. 전업주부시절 나 역시 그랬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패션을 좋아하기도 하고, 나중에 복직하면 다 쓸거야라는 마음으로 당시의 소비를 정당화 했었다. 돌이켜보면 전업주부나 아이 엄마와 같은 이미지가 지배적이었다면 실력과 무관하게 나에게 재취업이라는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예쁘고 잘생길 필요는 없다. 고가의 아이템으로 휘감을 필요는 더더욱 없다. 하지만 나의 전문성과 내가 가진 역량과 경력을 어필해야 하는 순간에 나를 돋보이게 코디할 수 있는 센스와 아이템은 중요하다.
강홍민 기자 kh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