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와 여당이 소상공인과 서민의 대출 연체 기록을 대폭 삭제하는 ‘신용사면’에 나선다. 대상자는 최대 290만 명에 이를 전망이다. 금융권에서는 “가계부채가 폭증한 가운데 도덕적 해이를 부추길 수 있는 정책”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당정은 11일 국회에서 ‘서민·소상공인에게 힘이 되는 신용사면 민·당·정 협의회’를 열고 이 같은 방안을 발표했다. 유의동 국민의힘 정책위원회 의장은 “외환위기 시절과 2021년 코로나19 유행 당시 취약차주에 대한 신용회복을 세 차례 지원한 선례가 있다”며 “이번에도 엄중한 경제상황을 고려해 적극적인 신용회복 지원이 필요하다는 데 당정이 공감대를 이뤘다”고 말했다.
구체적으로 2021년 9월부터 올해 1월까지 2000만원 이하를 금융권에 연체한 이들 중 오는 5월까지 채무를 전액 상환한 경우에 한해 연체 기록을 삭제하기로 했다. 현재는 한 번 대출 상환을 연체하면 돈을 모두 갚더라도 최장 5년간 금융 거래에서 각종 불이익을 당한다. 특히 3개월 이상 연체하면 금융기관과 신용평가사에 관련 내용이 공유돼 이후 대출을 받을 때 추가 금리 부담을 지고, 신용카드 이용 가능액 등도 제한된다.
스마트폰 등 통신비 연체자에 대한 구제안도 대책에 포함됐다. 금융권 대출과 통신비를 동시에 연체한 이들의 원리금을 깎아주는 채무 조정을 시행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최대 37만 명의 통신비 연체자가 혜택을 받을 전망이다. 유 의장은 “금융과 통신 채무를 동시에 연체한 사람은 금융 채무만 연체한 사람에 비해 경제 사정이 더 어려운 한계 채무자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며 “통신업계와 신용회복위원회가 협의해 채무 조정 방안을 마련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기초생활수급자 등 취약계층에 대해 신속채무조정 특례도 확대한다. 신속채무조정 시 이자 감면 폭은 현행 30~50%에서 50~70%로 확대된다. 대상자는 연 5000명 정도로 예상된다.
금융권에서는 이 같은 방안에 대해 “총선용 포퓰리즘 정책”이라며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한 시중은행 여신 담당 임원은 “취약계층을 돕겠다는 취지는 이해하지만, 성실하게 빚을 갚아온 차주는 대체 뭐가 되느냐”며 “향후 빚을 갚지 않아도 된다는 심리가 만연해져 도덕적 해이를 부추길 수 있는 위험한 정책”이라고 비판했다.
당정이 신용사면 조치의 명분으로 내세운 ‘위기상황’에 대해서도 은행권의 시각은 달랐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외환위기 시절과 현재의 고금리 상황을 같은 선상에서 비교하는 것 자체가 난센스”라고 지적했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도덕적 해이 우려와 관련해 “올 5월까지 상환하는 사람에게 혜택이 가서 적극적인 상환을 유도하는 효과가 있다”며 “도덕적 해이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박주연/정의진 기자 grumpy_ca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