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서도 바이아웃 철 지났다"…글로벌 PEF의 변심[차준호의 썬데이IB]

입력 2024-01-10 16:20
이 기사는 01월 10일 16:20 마켓인사이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한국에서 바이아웃(경영권 인수) 거래로 이름을 알린 MBK파트너스와 KKR이 올해 들어 스페셜시츄에이션과 크레딧 본부를 전면에 내세운 덴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한 글로벌 사모펀드(PEF) 고위 관계자는 기자와 만나 "한국에서도 PEF들이 바이아웃 거래를 기다리기보단 막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스스로 수익 기회를 창출하는 거래들이 쏟아질 것"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저금리 시대엔 기업과 대주주들의 점잖은 동반자가 되겠다며 몸을 사리던 PEF들이 야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얘기다. MBK도 KKR도 바이아웃 대신 '크레딧 펀드' 전면에작년 말 자본시장에 지배구조 이슈를 던진 MBK파트너스 스페셜시츄에이션(SS) 본부의 한국앤컴퍼니(옛 한국타이어)그룹에 대한 경영권 인수 시도가 대표적인 사례다.

MBK파트너스는 명실상부한 동북아 최대 바이아웃 PEF였다. 코웨이, 오렌지라이프(현 신한라이프), 두산공작기계 등 대표적 회수 성과도 경영권 인수 거래였다. 주로 공개입찰에서 다른 후보를 압도할 높은 가격을 제시해 회사를 인수한 후 자산효율화 등을 거쳐 높은 가격에 매각하는 전략을 펴는 하우스였다.

MBK파트너스의 변신은 놀라웠다. 한국앤컴퍼니 경영권 공격 과정에서 사실상 '행동주의 펀드'를 표방하고 적극적인 공세를 벌였다. MBK파트너스는 2005년 첫 출범 이후 줄곧 글로벌 PEF와 대비되는 '한국식 PEF'를 내걸고 먹튀 선입견을 깨겠다고 공을 들였는데, 이번엔 전면에서 대기업 대주주에 대한 여론 공세를 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올 초엔 태영그룹의 유동성 위기 과정에서 KKR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KKR 크레딧본부는 한해 전 태영그룹에 4000억원을 대출하면서 태영 측이 보유한 에코비트 지분 50%를 담보로 잡았는데, 태영그룹에 재무 위험이 발생하면서 계약서 상으론 이를 몰취할 수 있는 여지가 생겼다. 몸값이 3조원까지 평가받는 에코비트 지분 50%를 4000억원에 몰취하면 앉은 자리에서 1조원 이상의 '대박'을 거둘 수 있는 기회였다. KKR은 몰취 대신 태영그룹의 워크아웃에 협조하며 공동매각을 진행하겠다고 밝혔지만, 태영 측의 워크아웃이 실패하면 언제든 지분 몰취를 진행할 수 있다고 단서를 열어뒀다.

KKR도 역시 한국에선 전형적인 '바이아웃' 하우스였다. 어피너티와 컨소시엄을 구성해 2009년 OB맥주를 18억 달러에 인수한 뒤 2014년 글로벌 주류 기업인 AB인베브에 58억달러에 매각해 잭팟을 거둔 것이 대표적 사례다. 2017년엔 LS엠트론의 동박사업부를 3000억원에 인수한 후 2019년 SKC에 1조2000억원에 매각하면서 2년여만에 9000억원의 수익을 거두는 등 명실상부한 경영권 거래 특화 하우스였다.

최근 들어 KKR은 유독 한국 시장에서 전통적인 경영권 인수(바이아웃)에 힘을 빼고 인프라 및 크레딧 전략에 힘을 싣는 모습을 보였다. 수년간 국내에서 진행된 대형 경영권 거래 딜에서 KKR의 이름을 찾기 어려워졌다. 대신 에코비트 설립, SK E&S의 2조4000억원 대출, 무신사 투자 등 인프라 및 크레딧 거래에 힘을 쏟았다. 주요 인력 보강도 대부분 인프라와 크레딧 부문에서 이어졌다.

KKR의 글로벌 본사의 공동 대표인 한국계 미국인인 조셉 배의 영향을 거론하는 분석도 있다. 조셉 배는 한국에서 진행한 오비맥주의 경영권 거래 단 한건으로 KKR 내 글로벌 헤드로까지 승진한 인물이다. 한국 시장에서 경영권 거래를 통해선 오비맥주 이상의 수익을 올리기 쉽지 않다는 것을 조셉 배 대표가 누구보다 잘 알다보니 구조화 및 대출 거래 등으로 대안을 찾으려는 기조가 반영됐다는 시각이다. 2019년 박정호 KKR 한국대표가 글로벌 파트너로 승진한 후 가장 먼저 받은 미션도 한국 내 인프라와 크레딧 등 바이아웃 외 다양한 투자 구조팀을 세팅하는 업무였다.

미국계 사모펀드운용사인 베인캐피탈도 국내에선 크레딧 투자로 2년만에 원금 대비 70% 수익률을 올린 바 있다. 2020년 '영단기·공단기' 브랜드를 앞세워 폭풍 성장을 보이던 에스티유니타스에 1400억원을 빌려준 후 자회사 매각, 유상감자 등 전방위 회수 전략을 통해 2200억원 이상을 회수했다. 2017년 프린스턴리뷰 인수 과정에서 과도한 빚을 지며 대주주의 경영권이 흔들리자 급한 불을 끄기 위한 백기사로 투입됐지만, 창업자를 이사회에서 몰아내고 기존 대주주 지분을 소각해 주도권을 쥔 뒤 추후 프린스턴리뷰 재매각 차익을 독식하며 '잭팟'을 이끌어냈다. 이외에도 지난해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에 3100억원 규모 대출을 제공한 H&Q코리아도 유사시 현대엘리베이터의 경영권을 쥘 수 있는 조항들을 대거 포함했다.
안정적 담보에 유사시 수익 기회도PEF들이 크레딧과 SS로 무게 추를 옮기는 배경엔 안정성과 업사이드를 함께 요구하는 출자자(LP)들의 요구도 반영됐다. 금리 인상으로 기대수익률이 높아지자 안정적 담보를 바탕으로 유사시 구조화를 통해 수익까지 함께 거둘 수 있는 구조화거래가 하우스의 실력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로 각광받으면서다.

글로벌 자본시장에선 저금리 기조가 막을 내리던 2022년 상반기부터 헤게모니 변화가 급격히 이뤄졌다. 골드만삭스는 올해 초부터 다른 자산운용 전략보다 크레딧 전략을 가장 최우선순위에 두겠다고 기조를 세운 데 이어 조직개편을 단행했다. 목표 타깃에도 제약이 없다. 글로벌 PEF 중 SS와 크레딧 투자에 가장 특화된 하우스로 꼽히는 아폴로는 2015년부터 이어진 저유가로 파산한 호주와 동남아 지역 내 오일시추 설비등을 크레딧 펀드로 대거 인수했다. 이후 유가가 반등하면서 막대한 수익을 올렸다.

국내에서도 저금리 시기 막대한 부채를 일으키고 이로 인한 후유증을 겪는 기업들이 크레딧·SS 펀드의 문을 두드리는 사례가 급증할 것으로 예상된다. 대주주의 경영권 혹은 회사의 유형자산 등 담보권 처분을 두고 양 측간 대치도 치열할 것으로 전망된다. 기업이 처한 재무적 특수상황을 공략하거나 미진한 지배구조를 공략해 투자 기회를 창출하려는 PEF들의 시도가 확산될 것이란 전망이다.

차준호 기자 chach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