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당국 '상처뿐인 승리'…"앞으로 워크아웃 유명무실화" 우려

입력 2024-01-11 09:53
수정 2024-01-12 15:36
이 기사는 01월 11일 09:53 마켓인사이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산업은행 등 채권단과 금융당국이 협공을 펼친 끝에 태영그룹의 백기투항을 받아냈지만 업계에선 '상처뿐인 승리'라는 평가가 나온다. 이런 식으로 팔을 비틀어 사재 출연을 강요하고, 계열사까지 내놓으라고 겁박하면 앞으로 누가 워크아웃(기업구조개선작업)을 택하겠느냐는 게 업계의 시각이다. 사실상 법정관리보다 더 가혹한 워크아웃 사례로 남아 워크아웃의 도입 취지가 퇴색됐다는 지적도 나온다.

11일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태영은 지난 9일 채권단에 태영건설의 워크아웃 개시를 위해 "필요시 지주사인 티와이홀딩스와 자회사인 SBS 보유 지분을 내놓겠다"는 의사를 전했다. 주요 계열사인 에코비트와 블루원, 평택싸이로, SBS미디어넷 등도 지분 매각 및 담보 제공을 통해 자금을 마련한 뒤 이를 태영건설에 지원하기로 했다. 윤석민 회장은 태영인더스트리 매각대금 416억원을 전액 태영건설에 사재 출연했다. 사실상 모든 것을 내려놓는 백기 투항이다.

업계에선 이번 사례를 계기로 부실 계열사를 가진 그룹사 입장에선 법정관리 대신 워크아웃을 택할 이유가 없어졌다고 입을 모은다. 워크아웃의 이행 조건이 법정관리보다 더 가혹해졌기 때문이다. 구조조정 전문 사모펀드(PEF) 운용사 관계자는 "법정관리를 택하면 부실 계열사 한 곳만 잘라내 죽이면 되는데, 주요 계열사를 팔고 오너가 사재 출연을 하고 지주사를 담보로 내걸면서까지 워크아웃을 갈 이유가 있겠느냐"고 말했다.

이번에 태영이 법정관리 대신 워크아웃을 택한 것도 사실상 금융당국이 팔을 비틀어 억지로 등을 떠민 것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워크아웃을 신청한 태영이 추가 자구안을 제출하라는 채권단의 요구에 미온적인 반응을 보이자 금융당국은 물론 국무총리와 대통령실까지 나서서 전방위적 압박을 하기도 했다.

태영건설을 살리기 위해 상장사인 티와이홀딩스와 SBS의 지분을 담보로 맡기는 의사결정을 한 건 티와이홀딩스와 SBS 주주들 입장에선 배임으로 볼 수 있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태영건설만 잘라내면 될 문제를 티와이홀딩스와 SBS의 위기로 전이시키는 건 회사에 손해를 입히는 결정이라는 설명이다.

다만 워크아웃과 법정관리라는 두 가지 선택지를 맞이할 부실기업 오너가 무턱대고 법정관리를 택해 '꼬리 자르기'에 나서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LIG그룹은 2011년 부실 계열사인 LIG건설을 돌연 법정관리에 넣었다가 법정관리 신청 열흘 전까지 부실을 숨긴 채 기업어음(CP)을 발행한 게 드러나 총수 일가가 구속되기도 했다. 태영 역시 태영건설을 법정관리에 보내면 글로벌 사모펀드(PEF) 운용사 콜버그크래비스로버츠(KKR)와 맺은 주주 간 계약에 따라 핵심 계열사인 에코비트 지분을 몰취 당할 가능성이 있어 기업회생을 고수했다는 분석도 있다.

전문가들은 결국 부실기업이 법정관리 대신 워크아웃을 택할 수 있도록 하는 채권단과 금융당국의 '운영의 묘'가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투자은행(IB) 업계 관계자는 "워크아웃보다 법정관리가 낫다는 선례를 남겨 워크아웃 제도 자체가 유명무실해지면 결국 피해는 정상 채권 회수가 어려워진 채권단과 부실기업의 협력업체 등에 돌아간다"며 "부실기업의 팔을 비틀어 무조건적인 책임을 지우는 대신 당근과 회유책을 함께 제공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종관 기자 pj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