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병연 칼럼] 국민연금, 포스코 개입 기준은 뭔가

입력 2024-01-04 17:51
수정 2024-01-05 00:26
2017년 대선 전후 ‘킹크랩 사건’으로 불린 댓글 조작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일명 드루킹과 그가 조직한 경제적공진화모임(경공모) 재판 과정에서 새롭게 드러난 사실은 ‘국민연금 장악 시도’였다. 당시 특검팀이 공개한 ‘외부용’으로 제작된 경공모 설명자료에는 “대선에서 승리해 정권을 장악하고, 국민연금공단을 통해 재벌 지배 및 구조 변경을 추진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국민연금을 장악해 기업을 좌지우지하겠다는 ‘연금 사회주의’ 구현 목표를 감추지 않았다. 그럴 만큼 국민연금은 무소불위 ‘자본 권력’이 돼 버렸다. 시장과 기업에 미치는 영향력은 세계적으로 비견할 사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지난해 이후 재계 서열 5위 포스코그룹과 12위 KT그룹 수장이 잇따라 추풍낙엽 신세가 된 것은 국민연금의 위력을 다시금 실감하게 한 사례다. 김태현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은 지난해 말 느닷없이 포스코 CEO후보추천위원회(후추위)의 차기 회장 선출 절차를 질타했다. “기존의 사외이사만으로 구성된 후추위가 공정하고 주주 이익을 충분히 대변할 수 있는지 의문”이라는 이유에서다. 그로부터 1주일 만에 최정우 현 회장이 차기 회장 선임 후보군에서 제외됐다는 소식이 나왔다. 이는 KT 사태의 데자뷔였다. 국민연금은 지난해 초 KT그룹 이사회가 구현모 당시 대표의 연임을 추진하려고 하자 이를 직격했다. 결국 최고경영자(CEO) 선임을 두 차례나 뒤엎은 끝에 경영 공백은 5개월이 지나서야 마무리됐다.

두 회사 모두 지난해 역대 최대 실적을 냈다. 주가도 승승장구였다. 이를 기반으로 연임(KT)과 3연임(포스코)이 무난할 것이란 시장 예상이 많았다. 하지만 국민연금은 구두 개입만으로 판도를 바꿨다. 포스코와 KT에 대한 국민연금 지분율은 각각 6.7%, 10.4%. 주주를 위한다는 명분이었지만 90% 안팎인 나머지 주주의 의사는 실종됐다.

국민연금이 5% 이상 지분을 가진 국내 상장사는 280여 개에 이른다. 대기업 대부분을 영향력 아래 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 회사 대표를 뽑을 때마다 공정이나 공익을 위해 국민연금이 일일이 간섭할 수는 없는 일이다. 포스코와 KT, 금융그룹 등 오너 없는 소유 분산 기업 회장이 ‘셀프 연임’ 구조를 구축하기 쉬운 것도 사실이다. 그렇더라도 국민연금 개입은 공식적인 기준과 절차에 따라야 하고, 주주권은 지분만큼 의결권으로 행사하는 게 맞다. 이미 정한 기준 없이 이사장이 나서 선택적·즉흥적으로 구두 개입하는 것은 섣부르고 위험하다. 정부 산하에 있는 국민연금 지배구조 특성상 ‘신관치 망령’을 부르는 것은 필연적이다.

국민연금이 굴리는 기금은 1000조원으로 불어났다. 유가증권시장 시가총액(약 2126조원)의 절반에 이르는 규모다. 운용기금을 모두 국내 주식시장에 쏟아붓는다면 유가증권시장 모든 상장사 지분의 50%를 사들여 경영권을 휘두를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런 자본 권력을 휘하에 둔 모든 정권에 국민연금 활용은 달콤한 유혹이다. 전임 정부가 기관투자가가 기업 의사결정에 적극 참여하는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한 것도 연금을 기업 경영 개입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시도에 다름 아니었다.

이런 유혹을 원천 봉쇄하는 길은 국민연금의 주식시장 투자금을 잘게 쪼개 자격 있는 운용사들에 전부 넘기는 것이다. 국민연금과 성격이 비슷한 일본 공적연금(GPIF)은 일부 채권을 제외한 모든 주식을 민간 운용사와 은행 신탁에 맡겨놓고 있다. 이것이 ‘국민의 연금’인 국민연금의 독립성과 수익성을 담보하는 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