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쓰러뜨린 '혐오정치'…더 부추기는 극단 지지자들

입력 2024-01-03 18:22
수정 2024-01-04 02:26
“횟집 혹은 정육점에서 쓰는 칼이라고 하던데 (중략) 인터넷에서 사서 날카롭게 갈았나 봐요.”

방송인 김어준 씨는 3일 자신의 유튜브 방송에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피습에 사용된 흉기를 이렇게 묘사했다. 불과 두 시간 뒤 경찰은 브리핑에서 “등산용 칼의 외형을 변형했다”고 밝혔다. 김씨가 가짜뉴스를 퍼 나른 것이다. 하지만 김씨의 방송에는 “짐승 잡는 칼이다” “칼을 갈았으니 얼마나 악랄하냐”는 식의 댓글이 달렸다.


이 대표 피습 사건은 ‘극단적 혐오 정치가 낳은 비극’이라는 평가가 많다. 지지하지 않는 정치인을 악마화해 제거 대상으로 삼고, 이를 통해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과 정치인을 띄우는 왜곡된 팬덤 정치 문화의 결과물이라는 지적이다. 그런데 양극단 지지자와 일부 유튜버가 이번 사태를 계기로 혐오 정치를 더 부추기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이날 오후 2시30분께. 이 대표가 입원한 서울 연건동 서울대병원 본관 맞은편에는 이 대표 지지자로 보이는 20여 명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한 여성이 “범인이 의뢰를 받고 범행했다. 김건희가 자객을 보낸 거다”라고 말하자 다른 지지자도 맞장구를 쳤다.

인터넷 커뮤니티에도 근거 없는 주장이 쏟아졌다. 서울대병원 의료진 대신 민주당 관계자가 이 대표 건강 상태를 언론에 브리핑하는 것을 놓고 “(윤석열 정부 들어) 서울대병원 신임 감사에 검찰 출신이 온 것과 관련된 것 아니냐”는 글도 나왔다. 현 정부가 이 대표에 대한 의료진의 언론 브리핑을 막고 있는 것 아니냐는 취지다.

극우 유튜버들은 피습 사건이 자작극이라는 음모론을 폈다. 구독자 약 85만 명을 보유한 한 유튜버는 피습 당시 상황을 설명하며 “누군가 잽싸게 하얀 천으로 (출혈을) 막던데, 어떻게 그렇게 막을 준비가 돼 있었는지 대단하다”고 의문을 제기했다. 흉기 공격이 계획돼 있었다는 취지다. 일각에서는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의 지지율이 오르자 이 대표 측이 ‘자작극’을 펼쳤다는 주장도 나왔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우리나라는 정치를 시스템이 아니라 사람 중심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며 “이렇게 되면 특정 정치인을 자신의 ‘구세주’로 생각하고, 그 결과 자신의 구세주와 반대되는 입장을 가진 정치인은 타도와 제거 대상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피의자 김씨의 소속 정당과 정치 성향에 양당과 지지자들이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도 혐오 정치의 부산물이라는 평가다. 정치권 관계자는 “피의자가 어느 당 당원인지는 본질이 아닌데 양측이 상대방에게 책임을 돌리기 위해 신경전을 펼치고 있다”며 “김씨 행동의 원인을 밝히고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정치인들마저 극렬 지지자들에게 편승해 혐오 정치를 부추기고 있다. ‘보복 운전’으로 1심에서 유죄를 받아 최근 자리에서 물러난 이경 전 민주당 부대변인은 전날 SNS에 “대통령이 민생은 뒷전이고 카르텔, 이념 운운하며 국민 분열을 극대화하니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거 아닌가”라고 했다.

한편 부산경찰청은 3일 피의자 김씨가 운영하던 공인중개사사무소와 충남 아산 자택을 압수수색한 뒤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경찰은 압수한 자료를 토대로 계획범죄 여부와 범행 동기, 공범 유무 등을 조사할 계획이다.

한재영/맹진규/원종환 기자 jyh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