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원순 칼럼] 2024년 '부처 칸막이' 철폐 원년으로

입력 2024-01-01 18:02
수정 2024-01-02 00:12
노무현 정권 출범 때 대통령직인수위원회를 담당하면서 각별히 기억에 남는 게 있다. 관료집단에 대한 유별난 불신이다. 이제 ‘586’으로 퇴출 압박을 받고 있는 당시의 실세 ‘386’ 그룹은 대놓고 이렇게 말했다. “부처의 기존 공무원은 아예 안 쓴다”. 비서실 구성의 원칙이기도 했다. 점령군 같던 첫 비서실의 비서관급 이상 가운데 ‘늘공’(늘 공무원, 직업 관료)은 거의 없었다. 치안비서관에 현직 경찰관이 기용된 정도였다.

하지만 ‘386 어공’(어쩌다 된 공무원)들의 큰소리는 오래 못 갔다. 둑은 대통령 직속 여러 위원회에서 먼저 무너졌다. 위원회 전성시대 정부답게 온갖 위원회가 생겼는데, 어디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모두 늘공을 하나둘 ‘파견’받기 시작했다. “도무지 예산 없이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서…”라며 겸연쩍어하던 모 실세 위원장의 대답이 인상적이었다. 기세등등했던 비서실까지 늘공을 불러들이는 데는 반년도 안 걸렸다. ‘독점·전문성·칸막이’가 뒤섞인 예산실의 벽은 예나 지금이나 높다. 드센 어공 386들도 일찌감치 손을 든 곳이다. 그쪽을 움직이지 못하면 복지도, 대북사업도 다 공허해진다. ‘재정 칸막이’ 기획예산처 다음은 ‘인사 칸막이’ 행정안전부였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조직·정원을 담당하는 행안부를 거쳐 결국 정부 내 힘센 순서대로 늘공들이 속속 청와대로 불려왔다. 김대중 정권 때 ‘중경회’ 교수들이 행시 경제 관료에게 자리를 다 넘겨주고 조기 퇴진한 것과 비교할 만했다.

새해 벽두부터 공직 얘기를 꺼낸 것은 ‘만만한 게 공무원’이어서가 아니다. 공공부문은 아직도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인사가 만사’라는 옛말이 공직만큼 잘 들어맞는 곳도 없다. 한국 공직문화에서 대표적인 폐단이 부처 간 칸막이 행정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2023년 마지막 국무회의에서 힘줘 말한 것도 이 문제였다. 대통령은 부처 간, 부서 간 벽을 허물고 협력을 강화하도록 제도적 뒷받침을 하겠다고 역설했다. 두 가지 방법론까지 제시했다. ‘과제 중심 행정’ ‘부처 간 인사교류 대폭 확대’다. 제대로 핵심을 짚었다.

물론 문제 제기도, 해법도 새롭지는 않다. 그렇다면 칸막이 논란이 수십 년째 반복되는 까닭은 뭔가. 그만큼 난제인 것이다. 공무원들 스스로 바뀌지 않는다면, 더해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두지 않으면 풀기 어렵다는 얘기다. 대통령이 신년사에서 이권 카르텔을 또 언급한 것을 보면 세밑에 아젠다로 던진 부처 간 칸막이 해체에 대한 기대를 조금 해도 될 것 같다. 이것만 잘해도 의미 있는 행정개혁, 칭찬받을 공공혁신과 규제완화가 된다.

칸막이 행정 혁파를 위해 세 가지를 제안한다. 무엇보다 주무 부처인 행안부에 전권을 주면서 정부 조직의 유연성을 도모할 필요가 있다. 올해 성과를 못 내면 행안부에 해체 수준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 국무총리가 다른 업무 다 미뤄두고 이런 혁신을 전담하는 것도 좋다. 부처 간 칸막이를 없애는 정도로는 부족하다. 공공 분야 전체는 물론 한때 시도했던 공직과 민간 기업 간 인사 교류도 제도화할 만하다.

부처에서 외청과 산하기관, 각급 지자체로 ‘톱다운 방식’으로 칸막이 허물기를 실행해가면서 행정의 기본 틀도 바꿔야 한다. 올해 정부 신년 업무보고가 부처 통합형의 주제별로 이뤄질 것이라는 소식은 그런 점에서 고무적이다. 최근 HD현대중공업 전무가 파견 형식으로 울산시설공단 이사장에 내정된 것도 주목할 사례다. 지방공기업법에 근거 규정이 마련된 후 첫 사례다.

보다 중요한 것은 칸막이 행정을 배태시키는 근본 요인을 제거하는 것이다. 예산부터 항목별로 정부 안팎에 ‘주인 행사자’들이 있다. 온갖 규제도 칼자루를 쥔 이들이 있다. 이권 카르텔이 생기는 기반이다. 여기서 행정 칸막이가 생긴다. 이 토대를 갈아엎어야 한다. 칸막이 행정 타파에 총리가 나서라는 것도 총리가 규제개혁위원회 공동위원장이기 때문이다. 이런 토양을 내버려 둔 채로는 대통령이 뭐라고 해도 근본 치료는 어렵다. 일 따라 수시로 변하는 기업 유연성의 절반이라도 따라가야 한다. 유능한 정부, 성과 내는 행정은 공직이 자기 영역, 곧 기득권을 포기할 때 가능해진다. 2024년, 칸막이 행정 타파의 원년이 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