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콥스키 음악의 발레 ‘호두까기 인형’만큼 다양한 안무와 내용의 버전이 공연되는 작품도 드물다. E.T.A. 호프만 원작의 ‘호두까기 인형’은 1892년 레프 이바노프 안무로 초연됐을 당시 극적 결함이 지적되며 혹평받았다. 하지만 이 작품에 지속적인 생명력을 부여한 것은 귀에 착착 감기는 차이콥스키의 빛나는 음악이다.
바실리 바이노넨, 조지 발란신, 유리 그리고로비치, 존 크랑코 등 탁월한 안무가들이 차이콥스키 음악은 그대로 살리면서 드라마를 보강한 버전들을 지난 연말 무대에 올렸다. 국내에서도 국립발레단, 유니버설발레단 등이 각자 매만진 ‘호두까기 인형’을 선보였다.
오는 14일까지 서울 코엑스점 등 메가박스 10개 점에서 상영하는 영국 로열발레단의 ‘호두까기 인형’(사진)은 국내 관객에게 낯설게 다가올 만하다. 국내에선 본 적 없는 안무와 내용의 버전이어서다. 영국 무용가 피터 라이트가 1892년 이바노프 버전을 토대로 춤을 바꾸고, 이전 버전에는 없는 호프만 원작 내용을 살렸다. 1984년 초연하고 1992년 대폭 수정했다. 로열발레단이 주 공연장인 런던 로열 오페라하우스에서 40년 가까이 공연한 대표 작품이다.
메가박스 상영분은 로열 오페라하우스의 2023~2024시즌 작품으로 로열발레단이 24일까지 공연하는 ‘호두까기 인형’ 중 지난달 12일 생중계한 공연 실황이다. 사탕 요정 역에 안나 로즈 오설리반, 과자나라 왕자 역에 마르셀리노 삼베, 드로셀 아이어 역에 토머스 화이트헤드, 클라라 역에 소피 올내트, 한스-피터(호두까기 인형) 역에 레오 디슨이 출연했다. 세계적인 명성의 로열발레단에서도 특별히 선별한 무용수들인 만큼 뛰어난 퍼포먼스와 연기를 펼친다.
다른 버전과 달리 주역 커플이 두 쌍 등장하는 게 특징이다. 1892년 이바노프 초연 버전이 받은 혹평 중 하나는 서사 중심의 1막에서 활약하는 클라라와 호두까기 인형이 춤의 향연이 펼쳐지는 2막에선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이를 의식했는지 피터 라이트 버전에서는 클라라와 호두까기 인형이 1막에서 제법 긴 파드되(2인무)를 여러 번 추고, 2막에 여러 민속춤을 추는 디베르스티망(줄거리와 상관없이 나오는 일련의 춤)에 간간이 주역으로 등장한다. 이에 따라 클라라와 호두까기 인형의 비중은 높아졌을지 몰라도 다채롭고 색다른 디베르스티망 특유의 재미는 줄어들었다.
1막 마지막의 눈송이 왈츠와 2막 디베르스티망을 마무리하는 꽃의 왈츠 군무는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겠다. 국내 양대 발레단의 버전에 비해 화려한 맛은 떨어진다. 실제 무대가 아니라 영상이 주는 한계일 수도 있다. 호두까기 인형에서 정상의 몸을 되찾은 한스-피터와 집으로 돌아온 클라라의 관계를 열어놓는 현대적인 결말은 인상적이다. 물론 한스-피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함박웃음을 짓는 클라라의 모습은 두 사람의 밝은 미래를 암시한다.
1막에 등장하는 아역들의 군무도 눈여겨볼 만하다. 영화 ‘빌리 엘리어트’의 주인공이 오디션을 통해 들어가는 로열발레학교 학생들이 활약한다. 앤드루 리튼이 지휘하는 로열 오페라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연주도 영화관의 입체적인 음향으로 충분히 즐길 만하다.
송태형 문화선임기자 toughl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