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이 가족의 경계를 넘어 사회적 역량으로 확대되고 있다. 지금까지의 돌봄이 ‘영유아 돌봄’, ‘고령층 케어’에 한정됐다면, 이제 보통 사람들의 일상도 돌봄의 대상이 된다. 무언가가 부족해서 채워주는 게 아니라 그냥 같은 인간으로서 서로 기대는 트렌드가 나타나고 있다. 편의점·동네 슈퍼가 돌봄의 역할편의점이 가장 대표적 사례다. 골목마다 24시간 불을 밝히는 편의점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돌봄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편의점 CU는 지역사회의 ‘파출소’ 역할을 맡고 있다. 결제 부스 내부나 단말기에 미리 지정된 경찰기관으로 연결되도록 부착한 신고 버튼은 위급 상황에 간편히 누를 수 있다. 많은 지방자치단체들도 1인 가구의 돌봄 사각지대를 살피는 데 편의점을 활용한다. 서울 영등포구는 지역 내 편의점과의 민관 협력을 통해 복지 사각지대 위기 가구 발굴을 위한 주민 접점 홍보활동을 강화했다. 경기 동두천시는 관내 편의점과 연계해 경제적 어려움으로 결식의 우려가 있거나 총체적 위기에 직면한 저소득 가정을 발굴하는 정책을 펼쳤다.
최근에는 골목의 카페, 술집, 독립서점 등이 주민들의 안녕을 챙기는 공간이 됐다. 서울 한남동 남산맨션 1층에 있는 보마켓은 생활제품을 판매하고 간이 식당을 겸하며 따뜻한 마을 카페 같은 친근한 분위기를 동시에 지향하는 ‘생활밀착형 동네 슈퍼마켓’이다. 가까운 식료품점이 자전거나 차를 타고 나가야 하는 외떨어진 아파트 단지의 특성상 누구나 오가며 들를 수 있는 동네 사랑방 역할을 한다. 주민들의 모임 장소가 되기도 하고, 동네 강아지의 생일 파티가 열리거나 학교나 학원을 마친 아이들이 잠시 들러 간식을 사먹으면서 부모를 기다리는 장소가 되기도 한다. 동네의 맥락을 반영한 동네 커뮤니티인 셈이다.
빨래방도 비슷한 기능을 담당할 수 있다. 부산 산복도로에 위치한 ‘산복빨래방’은 지역 언론의 역할은 무엇일까 고민하던 부산일보의 기자와 PD가 모여 빨래방을 열고 주민들의 이야기를 들은 단기 프로젝트였다. 2022년 5월부터 6개월 동안 열린 산복빨래방은 동네 주민들이 실제로 빨래도 하면서 동시에 소통할 수 있는 거점 역할을 했다. 이 프로젝트는 부산일보에서 기획기사로 진행되면서 더욱 유명해졌는데,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시대에 ‘빨래’라는 매개를 통해 서로 소통하고 안녕을 물을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1인 가구가 많은 동네에서는 단골 술집에서의 한잔, 자주 가는 카페 사장님과의 짧은 대화 자체가 중요한 기능을 담당한다. 오프라인 접촉보다 온라인 접속이 더 잦은 시대에 나의 안부를 물어봐주는 대상이 가족이나 친구가 아닌 내 집 근처에 있는 단골 가게가 되는 셈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젊은 세대 사이에서는 나의 커피 취향을 알고 있는 단골 카페, 주문하지 않아도 선호하는 안주를 내어주는 단골 술집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자부심이자 안도가 되기도 한다. 마음을 기댈 수 있는 안식처를 만들고 싶은 젊은 세대의 마음이 반영된 현상이다.
중고거래 플랫폼으로 시작한 ‘당근마켓’도 동네를 기반으로 ‘돌봄’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최근 당근마켓은 ‘당근’으로 사명을 변경했는데 ‘당근마켓’이 근처에서 구매를 할 수 있는 N차 신상 커머스만을 지향했다면, 이제는 “근처에 산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쓰던 물건을 나누고 맛있는 빵집을 알게 되고 새로운 자전거 친구를 만드는 등 이웃과 조금은 가깝게, 조금은 느슨하게 함께 사는 법을 매개하는 서비스로 확장함을 의미한다. 실제로 당근은 사람들이 동네를 기반으로 취미 모임을 만들고 관계를 맺는 장(場)으로의 역할을 강화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가슴'이 삶의 질 결정외로움이 지배하는 시대다. 편의점, 빨래방, 동네 카페 등이 코로나 기간 단절됐던 개인을 잇고, 서로의 안녕을 염려해주는 소통의 공간으로 진화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돌봄이 영유아, 고령층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서비스임을 시사한다. 매사추세츠대 경제학과 교수 낸시 폴브레는 <보이지 않는 가슴>에서, 자본주의 경제에서 성장을 추동한 원동력이 자신의 이윤을 좇는 ‘보이지 않는 손’이었다면 개인주의 사회에서 삶의 질을 결정하는 경제적 조건은 다른 사람을 돌보려는 ‘보이지 않는 가슴’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개인이 모래알처럼 파편화되는 각자도생의 시대에 ‘돌봄’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다. 모두가 모두에게 돌봄의 대상이자 주체가 되는 ‘보편적 돌봄’의 개념이 주목받고 있다.
최지혜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