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침도 틀어막은 엄청난 기운…'올라프손式 바흐'에 빠진 80분

입력 2023-12-17 18:16
수정 2023-12-18 00:17

‘자신만의 세계’를 만든다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재주를 타고난 사람도, 숱한 밤을 연습으로 지새운 노력파도 끝내 나만의 색깔을 만들지 못하곤 한다.

아이슬란드 출신 피아니스트 비킹구르 올라프손(39·사진)은 마흔도 안 된 나이에 세계적 권위의 클래식 전문지 그라모폰으로부터 “가장 고유한 세계를 가진 음악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은 연주자다. 틀에 박힌 형식에 자신을 가두지 않고 작품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과감한 시도를 거듭하다 보니 이런 별명을 얻었다.

지난 15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올라프손의 리사이틀은 이런 명성이 허명이 아니었다는 걸 증명하는 80분짜리 무대였다. 그가 들려준 작품은 바흐의 역작으로 꼽히는 ‘골드베르크 변주곡’이었다. 올라프손이 “지난 25년간 이 작품으로 앨범을 내기를 꿈꿔왔다”고 한 곡이다. 수미상관을 이루는 주제 선율 아리아와 이를 변주한 30개의 짧은 곡이 치밀하게 얽힌 이 작품을 그는 참신한 해석으로 풀어냈다. 세 곡씩 한 조를 이룬 구조상의 연결점을 충분히 드러내면서도 건반을 치는 속도와 무게, 피아노의 배음과 잔음 등을 예민하게 조율하면서 각 변주곡의 성격을 선명히 들려줬다.

사라방드풍의 아리아에선 손끝 감각만으로 건반을 가볍게 터치하면서 바흐 특유의 깨끗하고 생기 있는 선율을 펼쳐냈다. 때론 바로 옆에서 건반을 치는 것처럼 너무나 명료하게 들리다가도, 순식간에 수십m 떨어진 곳에서 두드리는 것처럼 울림이 옅어졌다.

처음 등장하는 카논 형식인 변주3에선 마치 대화하듯 양손을 긴밀하게 움직이면서 응집력 있는 소리를 만들어냈는데, 변주8에선 반대로 양손을 완전히 분리해 고음 선율은 두 배로 선명하게 하고 저음 선율은 그림자처럼 흐릿하게 그렸다. 그야말로 자유자재로 건반을 주물렀다.

그의 바흐는 확실히 남달랐다. ‘이 시대 최고의 바흐 해석자’로 불리는 헝가리 출신 피아니스트 언드라시 시프가 표현의 정석이라면, 그의 연주는 새로움의 연속이었다. 통상 바흐 작품에선 페달을 잘 안 쓰는데, 그는 자유롭게 페달을 쓰면서 악상 간 대비, 양감을 극대화했다. 뉴욕타임스(NYT)가 독창적인 해석으로 유명한 전설의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의 후계자로 그를 점찍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올라프손의 진가는 뒤로 갈수록 빛났다. 단조로 된 변주21에서 그는 피아노에 머리가 닿을 정도로 고개를 숙인 채 손을 움직였는데, 건반을 무겁게 누르며 짙은 애수가 배어 나오게 했다. 가장 느리고 긴 변주25에선 인상적인 연주를 보여줬다. 보통 연주 속도보다 훨씬 천천히 들려준 그의 연주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심해로 빨려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들게 할 만큼 강렬했다.

마지막 아리아에선 처음 들려준 것과는 완전히 다른, 아련하면서도 유려한 선율로 깊은 여운을 남겼다. 그 기운에 마지막 음이 울리고 나서도 약 10초간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기침 소리를 막으려는 건지, 너무나 감동해서인지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는 청중도 여럿 보였다.

“음악 애호가들의 영혼을 고양하기 위해 작곡했다.” 바흐가 골드베르크 변주곡 초판본에 쓴 글귀다. 올라프손은 때론 살랑거리는 나비처럼, 때론 비극적인 운명의 소용돌이처럼 바흐의 영혼을 청중에게 전달했다. 올라프손만이 들려줄 수 있는 바흐의 목소리였다.

김수현 기자 ksoohy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