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유럽연합(EU)이 만든 규칙을 지켜야 할까? 또 EU 기업들은 그 수많은 규제를 어떻게 견뎌낼까?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화학물질 규제, 에코디자인 규정 등 EU에서 쏟아져 나오는 각종 규제 법안들을 보며 문득 드는 의문이다.
미국 컬럼비아대의 아누 브래드퍼드 교수는 ‘브뤼셀 효과’라는 말로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브뤼셀 효과란 EU가 소비자 보호, 제품 안전, 환경 보호 등 보편적 가치를 바탕으로 규범을 만들면 다른 국가들과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이를 따르게 되는 현상을 말한다. 개인정보보호(GDPR)나 경쟁법, 화학물질 규제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EU의 규범이 전 세계로 확산되면서 EU 역내 기업은 규제에 대한 적응력을 먼저 갖추게 되는 반사적 이익도 누린다.
브뤼셀 효과를 가능케 하는 몇 가지 작동원리가 있다. 우선 EU가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소비시장이라는 점이다. 유럽 시장에 대한 접근을 차단한다는 위협만으로도 기업들에는 큰 압박으로 작용한다. 둘째, 유럽의 규제가 다른 나라들도 수긍할 수밖에 없는 보편적 가치에 기초한다는 점이다. EU의 규제 대부분은 서구적 가치에 기반하고 있으나 다양한 회원국들과의 이해관계 조율을 거치면서 역외국들도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수준으로 다듬어진다. 셋째, 다양한 언어로 정교하게 고안된 규범은 다른 나라들이 시행착오를 최소화하며 법제화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이처럼 EU는 역외국들의 자발적인 동의를 통해 조용한 패권을 누리고 있다. 이는 EU의 규범이 역내 이익보다는 공공의 이익에 부합한다는 믿음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자유주의 질서가 퇴조하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사태와 미·중 패권 경쟁을 겪으면서 EU의 규범은 좀 더 보호주의적 색채를 띠게 됐다. 산업 관련 법안들은 ‘전략적 자율성’이라는 모호한 용어로 포장돼 있지만 역내 공급망 구축과 유럽 우선주의를 지향하고 있다. 경제 안보에 대한 중요성이 부각되며 외국인 투자 심사가 강화되고, 수출 통제 가능성까지 내비치고 있다. 특히 통상 위협 대응 조치를 도입하면서 제3국 정부가 유럽연합 또는 회원국에 무역 압력을 행사할 경우 직접 보복할 수 있는 절차를 마련했다. EU의 경제주권을 지키기 위한 고육지책이라고는 하나 브뤼셀 효과가 작동하는 방식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브뤼셀 효과에 대해 의문이 생기면서 EU의 규범에 대한 우리 기업들의 대응도 좀 더 신중해질 필요가 있다. 유럽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EU가 만든 규칙을 따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규칙이 역외국으로 확산될지 여부는 분야별로 상이하다. 이러한 차이는 새로운 규범에 적응하기 위한 기업들의 변화 정도와 속도에 영향을 준다. 우회할 것인가? 근본적으로 변화할 것인가? 변화한다면 얼마나 빨리 변화할 것인가? 전략적 판단을 위해 EU 규범과 이에 대한 역외국들의 대응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