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향수 1번가' 신사동 거리‘흔들리는 꽃들 속에서 너의 샴푸 향이 느껴진 거야~.’
어떤 가요의 첫 소절처럼, 향기엔 많은 것이 담긴다. 좋았던 곳에 대한 추억, 돌아가고픈 한 시절, 옛 연인의 흔적까지…. 인간의 오감에서 후각이 가지는 힘은 생각보다 강하다. 시각, 미각, 청각보다 훨씬 더 오래 지속되는 게 후각이다. 그만큼 주관적이고, 순수하며 또한 본능적이다. 단 한 방울만으로 우리의 본능을 자극하는 향기. 이런 향에 이끌리는 ‘퍼퓸 마니아’가 가장 많이 모이는 길이 있다. 세로수길이다.
서울 강남구 신사동 가로수길 뒤에 숨은 세로수길은 차 두 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의 좁은 골목이지만 지금은 명실상부 ‘대한민국 향수 1번가’가 됐다. 올해 이곳에 자리 잡은 유명 향수 브랜드의 플래그십 스토어만 셀 수 없이 많다. 이웃이자 경쟁자로 자리 잡은 이들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썰렁했던 신사동 거리를 단숨에 ‘니치 향수의 중심’으로 바꾸고 있다.
세로수길을 퍼퓸 로드로 만든 터줏대감은 이솝이다. 10년 전부터 이 거리를 지켜왔다. 2014년 이솝 시그니처 스토어를 연 이후 르 라보(2016년), 탬버린즈(2017년)가 매장을 냈다. 올해엔 딥티크, 바이레도, 논픽션, SW19 등이 세로수길에 둥지를 텄다.
세로수길에 향수 브랜드가 모인 이유는 간단하다. 많은 브랜드가 같이 있을수록 서로 시너지를 낼 수 있기 때문. 마치 종로 약국 거리처럼 한 집 건너 한 집마다 각각의 향을 뽐낸다. 거리 한복판에서 모든 브랜드의 매장이 눈에 들어올 정도로 세로수길은 ‘오래된 골목’ 구조를 갖고 있어 호기심 많은 향수 마니아들의 쇼핑 욕구를 자극한다.
세로수길 퍼퓸 로드에 비슷한 매장은 하나도 없다. 외관부터 가장 눈길을 끄는 곳은 탬버린즈 매장. 건물 한쪽 벽면을 통째로 비운 뒤 블랙핑크 제니의 사진을 초대형 크기로 걸어놨다. 탬버린즈 모델인 제니의 사진 앞엔 브랜드 컬러인 연두색으로 칠한 벽과 바닥, 벤치가 설치돼 있다. 이 벽면은 제니의 얼굴과 함께 사진을 찍기 위한 사람들로 매일 긴 줄이 늘어선다. 내부로 들어가면 말 한 마리가 시선을 끈다. 멀리서 보면 살아있는 말이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색적인 공간 디자인과 설치 미술로 MZ세대가 열광한 안경 브랜드 젠틀몬스터의 세컨드 브랜드다운 공간 설정이다. 탬버린즈 매장엔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영상 작품도 볼거리다. 위층엔 별도의 전시장도 마련돼 있다.
이솝은 공간으로 승부한다. 유명 디자인 스튜디오 MLKK와 손잡고 가로수길 매장을 꾸몄다. 1층에 들어서면 작은 창을 통해 빛이 한 줄로 들어오도록 설계했다. 하늘, 나무, 햇살 등 도심 속에서도 자연을 최대한 느낄 수 있게 한 건축 디자인이 압도적이다. 주변 나무들을 감상할 수 있도록 향수 스토어로는 드물게 루프톱을 만들었다. 가을날 향기와 함께 흔들리는 노란 은행나무를 구경하기 위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됐다.윔블던에 반했던 '삼성맨' 향수 안에 런던을 담았다
'SW19' 강정훈 대표
요즘 서울 강남구 신사동 세로수길 ‘퍼퓸 로드’엔 향수 안에 런던의 시간을 담은 SW19이 화제다. 이 브랜드를 만든 강정훈 대표는 삼성에서 스포츠 마케팅을 담당하던 ‘삼성맨’. 농구 선수 출신인 그는 영국 주재원 시절 머물던 윔블던 집의 우편번호를 브랜드 이름으로 썼다.
SW19 안엔 그의 기억 속 윔블던의 시간이 고스란히 담겼다. 새벽 6시, 정오, 오후 3시와 9시, 그리고 자정…. 향수의 이름은 모두 시간을 따 와서 지었다. 그 시간대 윔블던에서 느꼈던 공기와 계절의 냄새, 분위기를 향수에 담기 위해 국내에서 직접 조향했다. 다른 브랜드들이 조향 에이전시를 통해 향기를 만들어내는 것과는 다른 방식이다.
“윔블던 집 앞 공원의 잔디와 이슬, 이끼의 향을 담은 게 6시예요. 햇빛에 반사된 연못의 청량함을 담은 정오, 나른한 애프터눈 티를 즐기던 오후 3시의 향도 있죠. 오후 9시에는 한밤중 캠프파이어에서 굽던 마시멜로의 느낌을, 집으로 돌아간 후 소중한 사람에게서 나던 살냄새를 표현한 자정까지, 저의 기억들을 모두 담았습니다.”
SW19이 몰두하는 ‘윔블던의 시간을 담은 향수’라는 세계관은 세로수길 플래그십 스토어 공간에도 구현됐다. 매장 한가운데 자리 잡은 대형 빈티지 벽시계는 들어서자마자 가장 눈길을 잡아끈다. 브랜드가 가진 ‘시간’의 정체성을 그대로 표현하기 위해 꼭 시계를 한가운데 놓아두려 했다고.
매장에 들어서는 사람들에게 이 세계관을 설명해주기 위해 고안한 방식은 ‘뮤직비디오’다. 글과 사진보다 영상과 음악이 향기가 담은 이야기를 더욱 가까이, 생생히 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다. 매장 한쪽에 비치된 헤드폰을 착용하면, 벽에 걸린 화면마다 각각의 향에 담긴 이야기가 음악과 영상으로 재생된다. 이 영상을 보고 음악을 들으며 이 느낌이 담긴 향수를 시향해볼 수 있다. 개인의 기억이 다른 이에게 전달되는 순간이다.
윔블던에서 가져온 기억의 조각들은 나가는 순간까지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문 앞에 마련된 ‘엽서 테이크아웃’ 공간이 그것. SW19의 다섯 가지 향기를 사진으로 담았다. 약 20장의 엽서를 자유롭게 가져갈 수 있다. 그 위에 향수를 뿌려 시각과 후각을 동시에 자극하도록 했다. 그 편지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 진한 잔상이 되기를 바라면서.
최지희 기자 mymasak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