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퇴직연금 시장 규모가 350조원을 돌파한 가운데 5대 은행의 연금 적립액이 1년 새 20조원 넘게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퇴직연금 사업을 통해 은행들이 운용·자산관리 수수료 수익 등 비이자이익 확대에 나선 결과로 풀이된다. 퇴직연금 가입자가 예금 대출 등 일반 고객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도 이유로 꼽힌다. 5대 은행 중에선 신한은행의 퇴직연금 적립액이 가장 많았고, 1년간 퇴직연금이 가장 많이 늘어난 곳은 하나은행이었다. ○“퇴직연금 늘려야 고객 확보”
22일 은행연합회에 따르면 올해 3분기 기준 국민 신한 하나 우리 농협 등 5대 은행의 퇴직연금 적립금은 142조4392억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0%(23조6604억원) 증가했다. 기업이 연금을 적립하는 확정급여(DB)형과 근로자가 적립하는 확정기여(DC)형, 근로자가 자율적으로 가입해 운용할 수 있는 개인형 퇴직연금(IRP)을 포함한 수치다.
퇴직연금은 가입자가 중도에 이탈할 가능성이 작아 초장기 자금을 끌어올 수 있는 은행의 ‘유동성 창구’로 꼽힌다. 은행들은 퇴직연금을 관리하면서 매년 운용과 자산관리 수수료를 부과하는데, 가입 기간이 길어질수록 적립금이 불어나 수수료 수익도 늘어난다. 운용 수수료는 자산평가액의 연 0.1~0.4%, 자산관리 수수료는 0.3% 내외로 책정된다.
은행들은 수수료 수익은 물론 장기 고객을 확보하기 위해 퇴직연금 쟁탈전을 벌이고 있다. 5대 은행 중 퇴직연금 적립금 총액은 신한은행이 37조2263억원으로 가장 많았다. 신한은행은 올해 초 연금솔루션 마케팅부를 신설해 가입자 연령별 특화 채널을 개발하고, 건강 취미 요양 등과 연계한 비금융 서비스 사업도 구상 중이다.
하나은행의 퇴직연금 적립금은 30조1418억원으로 작년 동기 대비 25.7%(6조1674억원) 늘어 증가 속도가 가장 가팔랐다. 하나은행장 시절부터 ‘퇴직연금이 미래 먹거리’라며 사업 확대를 주문해온 함영주 하나금융그룹 회장의 전폭적인 지원 덕분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영업통인 함 회장은 “과거엔 아파트 관리비 수납 은행이 고객을 모았다면 앞으로는 퇴직연금이 그 역할을 할 것”이라며 퇴직연금 사업 강화를 주도해왔다.
하나은행은 지난해 10월 은행권 최초로 자체 연금 브랜드 ‘하나 연금닥터’를 선보였다. 가입자의 재테크 성향에 맞는 생애주기별 투자 포트폴리오를 구성해 은퇴 전까지 연금을 꾸준히 납입할 수 있도록 한 게 특징이다. 올해도 퇴직연금 투자 서비스에 만기매칭형 채권 상장지수펀드(ETF)를 연계하는 등 상품을 다양화했다. ○디폴트옵션 놓고도 경쟁 치열지난 7월부터 의무화된 디폴트옵션(사전지정운용제도) 퇴직연금 시장에선 신한은행과 국민은행의 선두 싸움이 치열하다. 디폴트옵션은 퇴직연금 가입자의 운용 지시가 없으면 사전에 지정한 금융상품으로 적립금을 자동 투자하는 제도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올 3분기 말 신한은행의 디폴트옵션 퇴직연금 누적 적립금은 1조1710억원으로 은행권에서 가장 많다. 직전 2분기와 비교하면 251.7%(8380억원) 급증했다. 신한은행은 디폴트옵션 의무화 전부터 전담조직을 만들어 4만7000여 개 기업 내 퇴직연금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설명회를 열었다. 국민은행도 안정적인 수익을 낼 수 있는 상품 라인업을 확대해 고객 유치에 나선 결과 같은 기간 적립금이 3118억원에서 1조143억원으로 225.3%(7025억원) 불어났다. 국민은행 디폴트옵션 상품의 6개월 최고 수익률은 연 5.34%로 2위인 신한은행(연 2.32%)보다 약 3%포인트 높다.
이소현 기자 y2eon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