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창이국제공항에서 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주룽 혁신지구. 싱가포르 정부가 2016년 세운 경제개혁 계획안에 따라 개발 중인 지역으로, 제조업 육성은 물론 공정 전반의 디지털전환을 주도하는 첨단 산업단지로 거듭나고 있다.
21일 이곳에서 현대자동차그룹의 미래 모빌리티 허브인 ‘현대차그룹 싱가포르 글로벌혁신센터(HMGICS)’ 준공식이 열렸다. 연구개발(R&D)부터 제조, 비즈니스 방식까지 혁신하기 위한 테스트베드로 2020년 착공해 이날 완공했다. 현대차그룹은 이 혁신센터를 울산 전기차 전용공장과 함께 50년 전동화 시대를 선도할 두 축으로 삼겠다는 계획이다. 사라진 컨베이어 벨트
혁신센터는 연면적 9만㎡, 지하 2층~지상 7층 규모다. 자동 물류 시스템부터 스마트 제조 시설, 차량 시승 트랙까지 갖췄다. 핵심은 아이오닉 5 등 완성차를 조립하는 3층이다. 끊임없이 돌아가는 컨베이어벨트 앞에 수백 명의 근로자가 공정 단계마다 서 있는 기존 공장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대신 타원형의 소규모 작업장 ‘셀’이 27개 설치됐다. 셀마다 생산직 한 명과 로봇이 들어가 차량을 최종 조립한다. 공장 물류 작업도 로봇이 맡고 있다. 자율주행 로봇(AMR)이 쉴 새 없이 다니며 각 셀에 부품을 나른다. 조립된 차체를 옮기는 것도 로봇(무인운반차량·AGV)이다.
조립이 잘됐는지 확인하는 업무는 보스턴다이내믹스의 네 발로 걷는 로봇 ‘스팟’이 맡는다. 근로자가 조립을 하나씩 마칠 때마다 스팟이 해당 부위를 촬영한 뒤 인공지능(AI) 알고리즘으로 분석해 품질을 확인한다. 혁신센터의 자동화율은 40%대로, 10%대인 일반 공장의 네 배다. 총 직원 수는 280명, 로봇은 200대다. 현대차 관계자는 “현재 50여 명의 생산직이 근무하고 있다”며 “생산직을 1.6배 정도 늘리면 연간 3만 대를 생산할 수 있다”고 말했다.
현대차그룹이 셀 방식을 도입한 것은 점차 다양해지는 소비자 주문에 맞춰 맞춤형 차량을 유연하게 생산하기 위해서다. 운전할 필요 없는 자율주행차가 확산하는 데 따라 내부 공간 등에 다양한 고객 취향을 반영할 수 있는 다차종 소량 생산 시스템을 구현한 것이다. 현대차 관계자는 “한 가지 상품만 대량으로 생산하는 20세기 ‘포디즘(Fordism)’으로는 신차 수요 변화에 따른 기회손실이 생길 수밖에 없다”며 “앞으로는 컨베이어 벨트와 셀, 두 개의 생산 방식이 공존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혁신 플랫폼 도입…효율 극대화현대차그룹은 혁신센터에서 개발, 실증한 제조 플랫폼을 미국 조지아 및 울산 전기차 전용공장 등에 단계적으로 적용해 생산 효율을 극대화할 계획이다. 이에 앞서 싱가포르에서 미래 모빌리티에 대한 시장 반응을 살피고, 도입에 따른 도시의 변화를 시험할 예정이다. 서울보다 조금 큰 싱가포르는 다양한 테스트에 가장 적합하다는 게 현대차그룹의 판단이다. 싱가포르의 개방적인 정책과 경제, 인재 등 뛰어난 인프라도 강점이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은 준공식 후 기자들과 만나 혁신센터에 대해 조목조목 설명했다. 그는 싱가포르에 입지한 데 대해 “전 세계에서 인재가 많이 모이고 있어 다양한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다”며 “공장 자동화, 자동화를 통한 품질 향상 등 많은 기술을 습득해 전 세계 공장에 확산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공장 자동화와 관련해선 “차체, 도장 등은 많이 자동화됐지만 의장 쪽은 아직 안 됐다”며 “미래에는 로봇이 제조하게 되는데, 이곳에서 준비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정 회장은 대규모 투자 계기를 묻는 말에는 “자동화되면 완성도를 높이고 코스트를 줄일 수 있다”며 “여기서 돈을 버는 건 쉽지 않겠지만, 이 기술들을 전 세계에 전파해 다른 공장에서 코스트를 줄이면 된다”고 강조했다.
현대차그룹은 혁신센터와 똑같은 쌍둥이 공장을 가상의 3차원 공간에도 지었다. 한국에서 디지털 공간을 이용해 혁신센터 설비를 제어하고, 혁신센터 내 로봇이 쌍둥이 공장을 참고해 실제 업무를 수행할 수 있다. 혁신센터는 소비자가 차량 주문부터 인도까지 모든 과정을 경험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싱가포르=김일규 기자 black0419@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