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건축가 자하 하디드가 설계한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얼마 전부터 이곳 잔디 언덕에 풍선 인형들이 쭉 들어섰다. 아이 몸집만 한 1m짜리부터 8m 높이 초대형 풍선까지. 언덕 위쪽으로 갈수록 풍선의 키가 크다.
풍선 인형이 뜻하는 건 ‘한국인 기대수명’이다. 1900년 20세를 겨우 넘었던 기대수명이 120년 동안 80세로 늘었다는 데이터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설치 작품이다. 작가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세계적 그래픽디자이너 스테판 사그마이스터(61·사진). 상업적으로 성공한 디자이너인 동시에 뉴욕 현대미술관(MoMA), 필라델피아 아트뮤지엄 등이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실력 있는 예술가다.
롤링스톤즈, 제이지 등 팝스타들의 앨범 표지와 리바이스, 스와로브스키 등 글로벌 브랜드의 광고가 그의 손에서 태어났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2008년 대선 당시 선거 포스터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하자 “안식년이라 안 된다”고 거절한 배짱 좋은 예술가이기도 하다. 몸에 칼로 글자를 새긴 ‘괴짜 예술가’
DDP에서 개인전 ‘나우 이즈 베터(now is better)’를 열기 위해 방한한 그를 한국경제신문이 지난 16일 만났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왜 과거보다 지금이 낫냐”고. 그러자 사그마이스터가 입고 있던 코트를 벗었다. 코트 안에는 칼 모양 그래픽과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 “중세 이후 유럽의 살인 사건 건수 변화 추이예요. 살인 사건 건수가 이렇게 점점 줄어듭니다. ‘나우 이즈 베터’ 맞죠?”
그의 이름을 세계에 알린 것도 ‘칼’이었다. 1999년 미국그래픽디자인협회(AIGA)가 그에게 포스터를 의뢰하자 자신의 상반신 전체에 칼로 글자를 새긴 뒤 사진을 찍어 보냈다. 예술가의 창작의 고통을 직관적으로 보여준 이 포스터는 지금도 ‘가장 충격적인 포스터’ 중 하나로 꼽힌다.
“엄청나게 아팠죠. 하지만 이거야말로 디자인의 본질을 보여준다고 생각했습니다. 몇 초 안에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아야 한다는 점에서요. 당시만 해도 포토샵이 흔치 않아서 다들 제가 진짜 칼로 글자를 새긴 걸 알 수 있었거든요.”
그는 이런 파격적이고 참신한 방식으로 대중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2008년엔 뉴욕의 한 갤러리 벽을 잘 익은 노란색 바나나와 덜 익은 초록색 바나나 7만2000여 개로 채워 ‘자신감은 좋은 결과를 낳는다’는 텍스트를 만들었다. 바나나가 점차 익으면서 메시지가 사라지는 걸 통해 자신감은 쉽게 사라진다는 것을 눈으로 보여줬다.
2010년 리바이스 청바지 광고에선 톱니바퀴가 천천히 돌아가면서 ‘우리는 모두 노동자’라는 문구를 만들어내도록 했다. 당시 리바이스 광고판 앞은 글자가 완성되는 몇 초를 카메라에 담으려는 뉴요커들로 붐볐다. “인류는 언제나 좋은 쪽으로 나아가”그런 그가 이번엔 ‘지금이 낫다’는 메시지로 한국을 찾았다. 공허한 메시지는 아니다. 작품 모두 연구논문이나 보고서에 나온 수치를 바탕으로 만들었다. 예컨대 중세풍 회화 위에 그려진 그래픽은 전쟁으로 인한 사망자가 1950년 10만 명당 25명에서 2020년 2명으로 줄었다는 역사적 근거, 대기오염으로 인한 사망자가 1990년 10만 명당 150명에서 2018년 94명으로 감소했다는 데이터를 기반으로 했다.
“요즘 젊은 세대는 이전 세대보다 살기 힘들어졌다고들 말하죠. 하지만 객관적 수치를 보세요. 우리는 덜 위험하고, 더 쾌적한 환경에서 살고 있습니다. 미래는 지금보다 더 나아질 거고요. 이런 희망적 관점을 재미있는 방식으로 전달하는 것도 디자이너의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말처럼 지금 세상은 그렇게 희망적일까. 부의 불평등은 갈수록 심화하고, 전쟁과 학대는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데.
“단기적으로 보면 마냥 좋다고 할 수는 없죠. 하지만 장기적으로 생각해보세요. 과거엔 프랑스와 영국이 별것도 아닌 걸로 100년 동안 죽기 살기로 싸웠지만, 지금은 안 그러잖아요. 한 발짝 뒤로 물러서더라도 두 발짝 나아가는 것. 인류는 늘 이렇게 발전해왔고 더 나은 쪽으로 향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야외 설치작품은 12월 31일까지, 전시는 내년 3월 3일까지.
이선아 기자 sun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