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상화의 사전적 의미는 ‘사람 얼굴을 그린 그림’이다. 독일 출신 현대미술 거장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베티’는 예외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초상화 가운데 하나인 ‘베티’는 눈 코 입이 없다.
리히터가 자신의 딸 베티를 모델로 그린 작품은 세계에 30점만 있다. 이 가운데 하나가 서울행 비행기를 탔다. 목적지는 서울 삼성동 에프레미디스 갤러리의 ‘디바이드 스카이’ 전시회. 독일 갤러리 에프레미디스는 올해 5월 문을 열었다. 이번 전시회를 위해 독일 본사가 소장한 작품 600여 점 중 ‘베를린과 서울의 만남’을 주제로 20여 점을 골라 서울로 불러들였다.
전시에서 볼 수 있는 ‘베티’는 리히터의 1988년 작품이다. 머리카락 한 올 한 올까지 섬세하게 살려내 언뜻 보면 사진으로 착각할 정도다. 사진을 캔버스에 투사해 원본과 똑같이 묘사하는 작업 방식으로 초상화를 그렸기 때문이다. 사진과 작품의 차별점을 만들기 위해 모든 경계를 뿌옇게 처리하며 신비로움을 더했다.
‘베티’ 바로 옆에는 리히터의 또 다른 작품 ‘추상화 551-6’이 걸렸다. 자신의 딸을 생생하게 그린 것과 달리 주제는커녕 형체도 알아보기 어렵다. 갤러리의 의도는 리히터가 한 가지 작업 방식에 갇히는 것을 극도로 거부한 작가라는 것을 관객에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그는 사실주의 추상주의 등 여러 기법을 넘나들며 활동하고 있다.
에프레미디스는 이번 전시에서 리히터 작품 외에도 서로 다른 세대 예술가들의 작품을 나란히 배치했다. 시대와 장소, 문화의 장벽을 넘어선 작가들 간의 유대와 연결고리를 보여주기 위해서다. 리히터처럼 세계가 인정하는 작가부터 이제 막 갤러리스트들의 눈에 든 신진 작가를 한 곳에 세웠다. 새우 모양을 한 전등, 담배꽁초가 그대로 함께 놓인 잎이 떨어진 나무 설치작품 등 유명 작가 작품 외에도 새로운 시도를 한 작품을 함께 만날 수 있다. 전시는 내년 1월 6일까지.
최지희 기자 mymasak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