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7월, 서울 신논현역 식당가. 그 얼마 전 한국에 상륙한 미국 햄버거 브랜드 쉐이크쉑 매장 앞에 1500여 명이 긴 줄을 만들었다. 햄버거 하나 먹겠다고 점포 문을 열기도 전 이렇게 많은 사람이 줄을 서고, 그중엔 서너 시간 기다린 사람도 있다는 소식은 당시만 해도 ‘황당 뉴스’에 가까웠다.
그로부터 4년이 흐른 2020년 7월, 쉐이크쉑은 다시 한번 뉴스의 중심에 섰다. 이번 주인공은 햄버거가 아니라 매장 한쪽 벽에 걸린 대형 그림이었다. 여러 사람이 버거와 콜라를 먹는, 평범한 그림을 보러 사람들이 몰려든 것. 이유는 이걸 그린 이가 장 줄리앙(사진)이어서다. 미국 뉴욕타임스와 영국 가디언 등이 ‘주목해야 할 그래픽 디자이너’로 꼽은 바로 그 작가다. 그림 한 장으로 무명에서 스타로줄리앙의 그림은 단순하다. 동그란 눈과 길쭉한 코, 슬그머니 올라간 입꼬리. 어린아이의 낙서 같기도 하고, 만화 캐릭터 같기도 하다. 그래서 줄리앙 작품을 본 이들에게서 나오는 가장 흔한 첫 반응이 ‘이 정도는 나도 그릴 수 있다’이다.
그런 줄리앙을 세계적 스타로 만들어준 건 2015년 인스타그램에 올린 그림 한 장이었다. 그해 11월 13일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단체 IS 조직원은 파리 시내와 인근의 축구장 및 공연장 식당 등에서 총기 난사와 자살 폭탄 공격을 감행했다. 줄리앙은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테러 소식을 접하고 3분 만에 ‘피스 포 파리(Peace for Paris)’란 그림을 그렸다. 파리 에펠탑과 평화를 상징하는 ‘피스 마크’를 합친 그림이었다.
단순하면서도 강렬한 이 그림은 ‘파리 테러’ 추모의 상징으로 떠올랐고, 소셜미디어를 타고 순식간에 세계로 퍼져나갔다. 줄리앙은 순식간에 인스타그램 팔로어 100만여 명을 거느린 유망 디자이너가 됐다. 언론들은 앞다퉈 그를 조명했고, 다양한 브랜드로부터 ‘러브콜’이 쏟아졌다. 대학 다 떨어진 게 행운줄리앙의 꿈이 처음부터 디자이너였던 건 아니다. 그는 원래 애니메이션을 전공하고 싶었다. 여러 학교에 지원했지만 모두 떨어졌다. 그때 딱 하나 붙은 게 프랑스 캥페르에 있는 미술학교 르파라클레였다. 줄리앙은 그곳의 그래픽디자인 전공 신입생이 됐다.
줄리앙은 항상 스케치북과 연필을 갖고 다닌다. 그러다 인상적인 장면이 눈에 들어오면 바로 스케치북을 꺼낸다. 창의성을 잃지 않기 위해 매일 그림일기도 쓴다. 일상에서 영감을 얻는 덕분에 그의 그림에는 ‘공감’이 묻어 있다.
신선한 채소와 과일이 곁에 있는데도 몸에 안 좋은 담배를 향해 손을 뻗는가 하면, ‘코로나 록다운(봉쇄조치)’ 당시 노트북 화면을 뚫고 와인잔을 부딪치는 사람들을 그리기도 했다.
일상을 뺏긴 사람들에게 일상을쉐이크쉑 한국 1호점에 설치된 그림도 마찬가지다. 그림 속 사람들은 혼자 햄버거를 먹기도 하고, 옆 사람과 아이스크림을 나눠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코로나 첫해에 설치된 이 작품을 통해 줄리앙은 사람들에게 일상의 소중함을 돌려주고 싶었다. 그림은 올해 8월 쉐이크쉑 1호점이 이사하면서 강남대로점에 재설치됐다.
줄리앙은 그림을 그리는 목표를 이렇게 설명했다. “더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는 겁니다. 화장실 표식은 언어가 달라도, 처음 봐도 누구나 바로 알잖아요. 그런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여기에 웃음까지 건네면 더할 나위 없겠죠.”
이선아 기자 sun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