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시간을 듣는 일이다. 그것의 정점은 무대 실황을 직접 보고 듣고 함께 호흡하는 것이다. 수백 번, 수천 번은 연주했을 레퍼토리라 해도 ‘단 한 번도 같을 수 없다’는 게 우리가 공연장을 찾는 이유 아닐까.
그토록 오래 살아남은 선율을 200년 가까이 아름답게 가꾸고 지켜온 ‘세계 톱3 오케스트라’가 11월 둘째 주 서울을 찾았다. ‘클래식 스타워즈’를 방불케 한 이 주간에 클래식 팬들은 만감이 교차했다. “내 생에 3대 오케스트라를 한 주에 서울에서 다 만날 줄 몰랐다”거나 “월급의 절반을 ‘클래식 플렉스’에 썼다”는 사람, “같은 날 공연이라 눈물을 머금고 한쪽을 선택했다”는 이도 많았다. 2023년 가을 서울에서 벌어진 ‘클래식 대전’의 단상, 사소한 질문과 그 답들을 지휘자와 협연자를 중심으로 기록했다. 완벽한 조형미…페트렌코의 베를린필베를린필은 올해 내한한 3대 악단 중 가장 큰 화제가 됐다. 갓 부임한 상임지휘자 키릴 페트렌코(51)가 국내 최고 피아니스트로 꼽히는 조성진과 함께 온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첫날엔 모차르트 교향곡 29번, 브람스 교향곡 4번 등을 연주했고 이튿날엔 베토벤 피아노협주곡 4번,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영웅의 생애’로 마무리했다. 특유의 꽉 차고 에너지 넘치는 사운드는 여전했다. ‘극세사 앙상블’이라는 평가가 나올 만큼 개별 단원의 기량도 뛰어났다.
페트렌코가 음악을 만드는 방식을 두고는 호불호가 갈렸다. 단원 개개인의 자율성을 극대화하는 빈필의 소키예프와 대조적으로 페트렌코는 악보에 최대한 충실하며, 단원들을 세밀하게 통제하는 데 집중했기 때문이다. 두 차례 공연에서 앙코르 없이 끝내고, 무대 입장 때 지휘자가 시선을 관객 쪽으로 크게 돌리지 않은 것도 그의 내향적이고 완벽주의적인 성격이 드러난 장면이었다. 손짓·몸짓·표정으로도 지휘한 소키예프빈필하모닉오케스트라는 3년 연속 내한했다. 그래서인지 비교적 기대와 신비감은 적었다. 1842년 창단해 세 악단 중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빈필은 그만큼 자부심이 강한 단체다. 그런 단원들을 이끈 지휘자는 러시아 출신 투간 소키예프(46). 그는 자신의 필살기인 프로코피예프 교향곡 5번에서 본인의 색채를 입히는 데 성공했다. 절도 있으면서도 변화무쌍한 그의 표정과 섬세한 손짓, 몸짓이 유독 돋보였다. 합창석에 앉은 사람들의 시선은 줄곧 지휘자를 따라다녔다. 연주 후기에 “합창석은 오늘 계 탔다”는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나온 이유다.
둘째 날 빈필의 단골 레퍼토리인 베토벤 4번 교향곡, 브람스 1번 교향곡을 연주할 때 소키예프는 이들의 고유한 색채를 온전히 드러내는 데 집중했다. 브람스 1번에서는 자체의 음영과 악기군 간 대비를 자연스럽게 나타내 빈필의 색채를 적극 활용했다는 평가(허명현 평론가)도 받았다. 탐미주의 조향사, 파비오로열콘세르트헤바우오케스트라(RCO)는 이탈리아 출신 파비오 루이지(64)와 함께 6년 만에 내한했다. 사실 빈필과 베를린필에 비해 국내에선 인지도 측면에서 불리했다. 2018년부터 상임 지휘자가 공석인 것에 대한 우려도 있었다.
기우였다. 이들은 조화로운 화음과 열정 넘치는 연주로 세 악단 중 가장 큰 호평을 받았다. 루이지는 메트로폴리탄, 코벤트가든 등 세계적인 오페라 무대에 많이 선 지휘자. 선율이 돋보이는 음악에 특히 강한데, 그런 면에서 베버의 ‘오베른 서곡’과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을 선택한 건 신의 한 수였다. 파비오의 차이콥스키는 전반적으로 템포가 느린 편이었다. 그러면서도 최대한 섬세하게 노래하는 부분을 살려내 늘어지거나 단조롭지 않도록 조율했다. 평소 조향에 조예가 깊어 자신의 이름을 딴 향수가 있는 루이지는 음악 역시 조향하듯 이끌었다. 연주 장소인 롯데콘서트홀과의 ‘케미’도 잘 맞았다. 촉촉한 음향과 풍부한 잔향이 RCO가 지닌 화사한 음색을 잘 살려냈다. 다음 내한은 클래식계의 아이돌로 떠오른 지휘자 클라우스 메켈레와 함께할 확률이 높다니, 벌써 다음 공연을 기다리는 팬들이 줄을 섰다. 라이너 호넥·케이트 울리…짜릿한 전율의 일등공신
로열콘세르트헤바우오케스트라(RCO) 단원들은 지난 11일 연주를 끝마치고 무대 위에서 서로를 끌어안았다. 이튿날 베를린필하모닉오케스트라 단원들도 공연 직후 뜨거운 악수를 나눴다. 마치 “우리 오늘도 최고였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3대 오케스트라 서울대전’의 진정한 주인공은 단원들이었다.
빈필하모닉에서 가장 돋보인 건 악장 라이너 호넥이었다. 30년째 악장을 맡고 있는 백발의 노장은 지휘자와 솔리스트로도 최고의 기량을 갖춘 인물이다. 빈필과 베를린필 멤버로 구성된 빈-베를린체임버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이기도 하다. 상임지휘자 없이 운영되는 빈필에서 사실상 지휘자나 다름없는 존재다. 짧은 솔로 파트에서도, 현악파트 합주에서도 호넥은 그가 빈필 ‘황금빛 사운드’의 일등 공신임을 증명했다.
빈필의 수석 바수니스트 소피 데르보는 32세에 베를린필의 수석 콘트라 바수니스트(2013~2015년)를 거쳐 빈필의 수석 바수니스트로 무대에 서며 ‘양대 악단’을 섭렵했다. 최근 지휘자로도 활동을 시작했다. 지난 7월 한국에서 한경아르떼필하모닉과 지휘 데뷔 무대를 가져 이번 공연이 더 반가웠다는 관객이 적지 않았다.
어느 악단보다 아름답고 조화로운 사운드를 선보인 RCO엔 악장 리비우 프루나루가 있다. 퀸엘리자베스콩쿠르를 비롯해 여러 국제 콩쿠르를 섭렵한 스타 플레이어. 1997년 우리나라에서 열린 동아국제콩쿠르에서도 우승한 바 있다. 2000년 RCO 현악 단원들로 구성된 암스테르담 현악 4중주를 결성한 ‘타고난 악장’이다.
RCO 공연의 스타는 단연 호른 수석 케이트 울리였다. 영국 출신인 그에게 단원들이 붙여준 별명은 마거릿 대처에 빗댄 ‘철의 여인(The Iron Lady of Horn)’. 베버의 ‘오베른’ 서곡에서 뱃고동처럼 둥글고 깊은 사운드를 들려줬고,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 2악장의 솔로 파트에서도 또 한번 활약했다.
베를린필은 스타 단원들의 갈라쇼를 보는 듯했다. 목관 주자들이 특히 눈에 띄었다. 클라리넷 수석 벤젤 푹스를 비롯해 플루트 수석 임마누엘 파후드, 오보에 수석 알브레히트 마이어는 모두 베를린필을 대표하는 목관 주자이자 세계적인 솔리스트들이다. 30년 이상 베를린필에서 호흡을 맞춰온 내공을 고스란히 보여줬다.
최다은/김수현/김보라/조동균 기자 max@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