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여인은 유리 속에 갇힌 것인가, 빠져 나오는 것인가

입력 2023-11-06 19:08
수정 2023-11-07 00:57

풍성한 머릿결에 굴곡진 몸매.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올 법한 고대 여신상이 전시장에 놓여 있다. 조금만 한 발짝 비켜서 보면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여신의 몸은 조각조각 해체되고, 그 사이로 푸른 바다가 펼쳐진다.

고명근 작가(59)가 제작한 ‘스톤 바디 36’(2008)이다. 작품은 보이는 것만큼이나 제작 과정이 특이하다. 조각상 사진을 투명한 필름에 인화한 뒤, 이를 조각내 마치 집을 만들듯 서로 붙이고 쌓아 올렸다. 여기서 질문. 그렇다면 이 작품은 사진일까, 조각일까, 건축일까.

서울 은평구 사비나미술관에서 최근 막을 올린 전시 ‘투명한 공간, 사이 거닐기’ 현장에서 만난 고 작가에게 직접 묻자, 이런 답이 돌아왔다.

“제 작품은 ‘사진조각’이에요. 사진의 평면성, 조각과 건축만이 갖는 입체성을 하나에 녹여냈기 때문이죠. 그래서인지 사진작가협회, 조각가협회 둘 다 절 특이하게 보더라니까요. 하하.”

시작은 아버지가 대학 입학 선물로 준 ‘엄청나게 비싼’ 니콘 카메라였다. 카메라를 얻은 뒤 그는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사진을 찍은 후 투명한 OHP(오버헤드 프로젝터) ‘비닐’ 필름에 출력하고, 방탄유리에 쓰이는 ‘플렉시글라스’를 양면에 붙였다. 이렇게 만든 각 패널의 모서리를 뜨거운 인두로 지져서 이어 붙였다. 고 작가는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처음부터 새로 해야 해서 인두 작업을 할 땐 초집중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고 작가는 이런 방식으로 무겁고 딱딱한 것을 가볍고 투명하게 만든다. 각 나라의 오래된 건축물(건물 연작)부터 고대 조각상(몸 연작)까지, 투명한 필름을 겹쳐서 만든 작품은 마치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엑스레이로 건물과 조각상을 찍은 듯하다. 여러 각도로 찍은 사진을 한데 합친 작품은 사람 눈으로는 결코 볼 수 없는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풍경을 만들어낸다.

이번 사비나미술관 전시는 30여 년에 걸친 그의 ‘사진조각 세계’를 총망라했다. 세 개 층에 전시된 작품은 무려 201점. 전시 구성과 연출 역시 고 작가의 독특한 작품 특성을 반영했다. 조명이 대표적이다. 강재현 사비나미술관 학예실장은 “조명을 작품에 직접 쏘는 대신 벽에 쏴서 반사되는 빛이 작품을 통과하도록 했다”며 “이렇게 하면 작품의 입체성을 한층 더 잘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보기엔 그저 아름답지만, 그 안에 담긴 메시지는 꽤나 심오하다. 바로 ‘모든 것의 실체가 없다’는 것. 고 작가는 “이미지로 가득 채워져 있지만, 사실은 투명하고 텅 비어 있는 작품처럼 우리가 지각하는 세상도 이처럼 보이는 것과 다를 수 있다”고 말했다. 전시는 11월 19일까지.

이선아 기자 sun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