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紳士·gentleman)라는 단어의 유래는 15세기 영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장미전쟁으로 귀족 수가 줄어들면서 영주권을 가지지 않은 부농들도 명문가 계층(gentry)에 편입돼 젠틀맨으로 불렸다. 산업혁명 뒤엔 자본가를 포함해 상류층 전반을 지칭했다. ‘신사협정(Gentleman’s Agreement)’이라는 용어가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19세기 영국 의회 기록에 등장하기도 하고, 20세기 초 미국에는 ‘물가 통제를 지향하는 신사들 간의 합의’란 문구도 있다. 이 용어가 널리 쓰이게 된 것은 1947년 엘리아 카잔 감독의 영화 ‘젠틀맨 어그리먼트(Gentleman’s Agreement)’가 큰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면서다.
영화 속의 신사협정은 반유대인 감정을 당연시하는 사회 저변 무언의 합의를 뜻한다. 외교, 법률관계 등에서 통용되는 신사협정은 성명, 선언 등 문서화하지만 법적 구속력이 없고 조약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법적 강제성이 없다 보니 위반 시 벌칙도 없다. 상호 간 신뢰가 그 기반이다. 법적 구속력이 없더라도 피해국은 보복 조치로 대응할 수 있다. 헌법재판소는 1991년 체결된 남북기본합의서에 대해 “신사협정에 준하는 성격에 불과하고, 조약으로 볼 수 없다”고 규정한 바 있다.
우리 정치권에서 신사협정이 여러 차례 등장했다. 2007년 정당 대표들은 투명한 대선을 치르자며 자금내역 공개, 지역주의·금권 공세 금지 등의 협약을 맺었지만, 며칠 가지 못했다. 지난 대선 때 더불어민주당은 ‘원팀 협약식’을 하고 네거티브 공방 진화에 나섰으나 싸움은 더 격해졌다.
여야 원내대표는 지난 24일 국회 회의장 내 피켓 부착과 고성·야유를 하지 않기로 신사협정을 맺었다. 그러나 민주당 의원들은 어제 윤석열 대통령이 내년도 예산안 시정연설을 위해 국회를 찾았을 때 본회의장 앞에서 단체로 ‘민생이 우선’ ‘국정기조 전환’ 등이 적힌 피켓 시위를 벌였다. 민주당은 회의장 밖이어서 신사협정 위반은 아니라고 하지만, 상호비방으로 품격을 떨어뜨리지 말자는 그 취지를 무색하게 했다. 악수를 청한 윤 대통령 면전에 “그만두시라”고 하고, 외면한 의원도 있었다. 이번에도 말만 앞세우고 신의는 없었던 모양이다.
홍영식 논설위원 ysho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