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에서 가능할까 싶던 유럽연합(EU)의 탄소국경조정제도(CBAM)가 10월 1일부로 발효됐다. 2025년 말까지 전환기를 거쳐 2026년 본격적으로 시행될 예정이다. EU 역외산 철강, 알루미늄 등이 역내로 들어올 때는 탄소배출량에 따라 탄소비용을 내야 한다. 이제 글로벌 교역에서 기존 관세 외에 일명 ‘탄소세’도 내야 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2019년 말 EU 집행위원회가 처음으로 CBAM을 도입하겠다고 했을 때 과연 어떻게 탄소배출을 측정할 것이며 어떤 기준으로 탄소비용을 책정할 것인가에 대해 논란이 분분했다. 나아가 이 제도를 도입하려는 목적이 소위 탄소누출(carbon leakage)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알려져 있었기에 환경보호를 빌미로 EU 역내 기업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라는 비난도 적지 않았다.
탄소누출이란 EU가 생산공정상 탄소배출량 감축 의무를 강하게 적용함에 따라 투자 부담이 늘어난 기업들이 생산 시설을 EU 역외로 옮기는 현상을 말한다. 즉 EU 역내에서 발생하는 탄소배출이 단지 역외로 장소만 옮겨 이뤄지고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아울러 EU 기업이 탄소저감 의무가 상대적으로 약한 국가산 수입 제품과의 가격 경쟁에서 불리해진 시장의 여건도 반영됐다.
약 2년의 의견 수렴 및 공공 협의, 특히 EU 특유의 3자 합의(집행위·의회·이사회) 과정을 거치면서 법안이 확정됐고, 당초 예정보다 늦어진 올해 10월부터 전환 기간에 들어간다. 전환 기간 동안 탄소배출량을 당국에 신고만 하면 되고, 2026년부터는 실제 탄소배출량에 따른 비용을 내야 한다. CBAM은 내용도 내용이지만, 그동안 다소 느리게 진행돼온 EU의 입법 절차가 비교적 신속하게 이뤄져 시선을 끌었다. EU의 강경한 입장을 보여준 것으로 평가된다. ○탄소배출량 t당 인증서 1장
가장 큰 관심을 받는 것은 역시 대상 품목이다. 현재 철강·알루미늄·시멘트·비료·전력·수소 등 여섯 가지 품목이 지정됐으며, 앞으로 품목을 점차 늘릴 방침이라고 한다. 제품에 내재된 직접 또는 직간접 온실가스배출량을 대상으로 한다. 공정별 배출 산정 기준 및 전구체 여부, 배출계수 등 세부 산정 방식이 복잡한 수식으로 정리됐다. 내년 말까지는 제3국 산정 방식도 인정되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일단 급한 불을 끄기도 했다.
여섯 가지 대상 품목을 EU 역외국에서 수입하려는 EU 수입업자는 CBAM 당국이 발행한 인증서를 구입해뒀다가 지정된 기간별로 수입 품목에 해당하는 배출량만큼 당국에 제출해야 한다. CBAM 인증서는 탄소배출량 t당 1개씩 적용하는데, 이 인증서 가격이 탄소비용이다.
인증서 가격은 EU의 탄소배출권거래제도(ETS)와 연계된다. EU의 ETS 평균 가격을 인증서 1장 가격으로 정하는데, 원칙적으로는 EU의 탄소배출권 가격과 수출국의 탄소배출권 가격 간 차액만 납부하면 된다. 최근 EU의 ETS 가격은 t당 70~80유로이며, 한국의 경우 1만2000원 수준이므로 t당 약 10만원의 차액이 발생한다. 이 차액을 EU로 수출할 때 추가로 지불해야 한다고 이해하면 쉽다. 물론 우리나라와 EU의 ETS 가격 차이만 지불하면 된다는 것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전환기 이후 2026년 본격 시행 전까지 확정된다고 하는데, 우리 정부가 관련 업계와 함께 EU 당국과 협의를 진행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전환기 동안 EU 당국은 탄소비용 수납과 정산 시스템을 갖춰놓을 것이다. 위반 시 최고 t당 100유로의 벌금을 부과한다니 도입 초기 기업에 과도한 부담으로 작용할 소지도 있다. 아울러 EU 역외국 제품, 즉 수입품에 대해서만 차별적으로 탄소비용을 내도록 하는 것은 세계무역기구(WTO)의 비차별 원칙에 위배된다는 의견도 팽배하다.
KOTRA가 현지 무역관을 통해 파악한 바에 따르면 EU 역내 기업의 반발도 적지 않다고 한다. 인증서를 구매하는 비용은 물론이고 일일이 수입품의 탄소배출량을 보고 인증서를 제출해야 하는 행정 비용도 만만치 않다. 자사가 수입하는 물품 가격이 상승하는 것은 더욱 큰 걱정거리다. ○가장 큰 영향받는 ‘철강’한국의 대(對)EU 수출에서 가장 큰 영향을 받는 품목은 철강이다. 지난해 한국은 EU에 총 681억달러어치를 수출했으며, 이 중 철강은 49억달러 규모다. 국내 철강업계는 탄소배출이 덜한 전기로보다 고로를 더 많이 사용하는 구조라고 한다. 탄소비용을 적게 내려면 전기로 제조공정을 더 확대해야 하는데 이는 설비투자를 해야 할 뿐 아니라 기존 고로 생산 제품 수준의 품질을 맞추기 위해서는 기술적인 부분에서도 연구개발이 이뤄져야 한다. 이왕 미래를 위해 추진해야 할 방향이라면 이참에 세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기를 바란다.
어려움은 비단 우리 기업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EU로 수출하는 전 세계 기업, 심지어 EU 역내 기업도 부담을 느끼고 있다. KOTRA 해외무역관이 만나는 해외 기업 중 CBAM 등에 준비된 한국 기업을 소개해달라는 요청이 늘고 있다. 규정과 규칙을 잘 이해하고 그것에 맞게 자사 설비와 제품을 정비하는 한편 요구 서류 등을 충실히 제공할 수 있다면 해외 파트너의 어려움을 덜어주는 셈이 된다. 아울러 자사의 탄소절감 목표를 달성하는 일석이조 효과를 노릴 수 있다. 선제 대응이 중요한 이유다.
처음에 EU가 CBAM 제도를 도입한다고 했을 때 국내 관련 업계와 유관 기관, 정부가 함께 모여 걱정하던 때를 기억한다. 2년여 기간에 정부와 우리 업계는 EU 집행위와 업계 관계자를 지속적으로 만나면서 우리 입장을 설명하고 이해시킨 결과, 최근 발표한 시행령에는 우리가 원하던 내용이 일부 반영되기도 했다. EU의 ETS 가격을 기반으로 CBAM 인증서 가격을 책정하기로 한 점도 EU에 못지않은 ETS를 운영해온 우리나라로서는 다른 나라에 비해 유리한 측면이다. 장벽을 만났다고 포기하는 대신 한 발이라도 앞서 대비하고 준비하면 오히려 우리에게 기회가 있다고 믿는다. 나아가 탄소중립 시대를 맞이하는 우리 산업의 경쟁력이 업그레이드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양은영 KOTRA 지역통상조사실장